전통가옥

[스크랩] 한민족 고유의 바닥 난방, 구들의 원리,역사-구들의 모든것

김프로님 2007. 8. 9. 00:33

한민족 고유의 바닥 난방, 구들의 원리

 대류현상, 베르누이 정리 적용

 


예전 우리네 겨울 생활을 생각해보면, 땔감, 아궁이, 굴뚝, 아랫목 등이 연상된다. 한민족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인 온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돌을 순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한다. 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선조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

한민족의 전통문화와 주거방식은 구들이라 불리는 바닥 난방과 관 련이 깊다.

 
겨울철 찬바람이 불어오면 따끈따끈한 아 랫목에 펼쳐둔 이불로 쏙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따스한 방바닥에 몸을 대고 있으면 몸에 전해지는 열기가 정말 좋다.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절절 끓는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시면서 “어구, 시원하다”는 말씀을 연신 내뱉으신다.

요즘같은 때 더욱 정감있게 느껴지는 우리 네 안방의 이런 전경은 우리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바닥 난방을 하는 방을 우리는 온돌방이라고 부른다.

온돌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사전에 한국의 전통 난방법이라는 설명 ‘Ondol’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다.

백수가 신세지는 구들장 그러나 온돌은 식자들이 한자이름으로 기술한 것으로 순수 우리말로는 ‘구들’ 이라고 한다.

구들은 ‘구운 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가집이나 기와집 같은 우리의 옛날 집에서 사용되던 바닥난방시설 그 자체를 말하거나 이와 같은 난방법을 이용한 방바닥 또는 방을 통틀어 가리킨다.

 

구들이 한민족의 생활에 얼마나 친밀했는지는 우리말의 여러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방이 어지러우면 “구들 좀 치워라”라고, 일자리를 잃고 놀고 있 는 사람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구들방만 지키고 있지”라거 나 “매일 구들장만 지고 있는 신세지”라고 말한다.


구들은 언제쯤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들은 구들의 시작이 인류가 불을 발견해서 이용한 불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원시인은 동굴이나 움막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추위를 면하기 위해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 주위에 돌을 세워 바람막이를 해 불을 오랫동안 보존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모닥불 주위에 세워 놓은 돌 위에 평평하고 넓은 돌을 얹어, 여기에 딱딱하게 얼어버린 짐승의 고기를 녹이거나 구워서 먹기도 하고, 그 위에 앉아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구들의 원시적 형태다.

구석기시대 중국북부나 만주지역에서 발생 구들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500-513년 북위의 역도원이라는 학자가 저술했다.

여기에는‘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는 구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외에도 중국 당나라 시대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도 구들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고구려인들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고 기술돼 있어 구들생활이 한민족의 문화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중국의 몇몇 문헌과 우리의 문헌,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근거로 구들학자들이 그 기원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구들의 발생 시기를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전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약 1백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발굴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으로 미뤄보아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 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구들이 발생됐으리라고 구들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발생한 초기 구들은 고인돌처럼 돌 아래에 불을 피우는 외구들 형태를

띠었다.   이후 이런 외구들 여러개를 길게 연결해 열기가 지나가는 길인 고래가 등장하는 외고래구들로 발전한다.

이로써 불 피우는 아궁이 쪽과 연기가 나가는 굴뚝 쪽이 분화된 것이다.

이후 이런 고래를 여러개로 확장해 겹구들로 진화하면서 아궁이가 설치된다.

 

1.외구들: 고인돌처럼 생긴 돌 구조 아래에 바로 불을 피우는 형태다.
2.외고래구들: 외구들을 여러개 길게 연결해 불을 피우는 아궁이와 연기가 빠지는 굴뚝 영역으로 분화된다. 이때 열기가 지나가는 통로인 고래가 등장한다.
3.겹구들: 고래를 여러개로 확장해 열기가 여러 곳으로 나눠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아궁이가 설치된다.
4.굴뚝의 등장: 움막과 같은 실내에 있었던 구들시설에 바깥으로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굴뚝이 생긴다. 그러면서 아궁이까지도 실내엣 벗어나, 방 한칸에 구들 한개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5.완성된 전통구들

처음 이와 같은 구들은 실내에 있었다.

 

따라서 매연 배기가 원활하 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결국에는 굴 뚝이 개발되게 된다.

 

그리고 실내 의 아궁이까지도 집밖으로 나간 다.

 

 방 한칸에 구들 한개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연 변에서는 아직까지도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주택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인의 오랜 경험적인 연구로 부넹기, 구들개자리, 고 래개자리, 굴뚝개자리가 개발된 다. 이로써 한민족의 전통구들이 완성된다(그림 1).

 

 


49일 온기 유지된다는 전설의 아자방

이렇게 완성된 구들에 대해 불가사의한 전설이 내려온다. 지리산 반야봉의 동남쪽 해발 약 8백m 고 지에 자리잡은 칠불사에는 신라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아자방’이라는 구들방이 있었다.

고래모양이 아(亞)자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방에 불을 한번 지피면 열기가 무려 49일 동안 유지됐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현재 아자방은 조선시대와 한국전쟁 당시의 몇차례 화재로 그 원형이 사라졌다. 그래서 1982년 구들 명장인 김용달(82세)옹이 이를 복원했다.

이때 이를 확인해본 결과 봄·가을에 온기가 10일 정도 유지된다고 한다.


구들전문가들은 전설의 49일이 유지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불가사의한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구들은 한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효율적인 우리 고유의 난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들은 오랫동안 열기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 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자. 불로 인해 아궁이 안의 공기는 가열된다.

가열된 공기(열기)는 연기와 함께 아궁이 후렁이 위쪽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뜨거운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한다는 대류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아궁이에서 지핀 불로 인해 데워진 열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구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올라간 열기는 부넹기의 좁은 통로를 만난다. 이때 열기의 이동 속력이 빨라 지면서 부넹기에서의 열기의 압력은 낮아진다. 바로 여기서 베르누이의 정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공기나 액체와 같은 유체는 지나가는 길이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속력이 빨라지고 압력은 낮아진다.

 

이는 어느 일정 시간 동안 어느 한 단면으로 들어간 유체의 양이 그 단면을 빠져나온 유체의 양과 같아야 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따라서 부뚜막보다 부넹기에서 압력이 낮기 때문에 부넹기는 열기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빨아들여 구들개자리로 넘겨주는 역할을 한다.


 

바다 속 고래 모양의 열 저장고 


                                                             

[다양한 고래의 형태]

 

그렇다면 부넹기를 넘어서 구들개자리로 들어간 열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때는 열기가 부뚜막에서 부넹기로 이동 할 때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왜냐하 면 부넹기의 좁은 통로에서 구들개자리의 넓은 통로로 열기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들개자리에서 열기의 속력이 급 격히 떨어지고 천천히 소용돌이 흐름(와류)이 생긴다. 한꺼번에 고래 쪽으로 이동 하지 않고 구들개자리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는 것이다. 구들개자리는 열기 저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들개자리에서 열기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살펴보자. 구들장 바로 아래를 지나는 위 부분의 열기는 구들장을 데우면서 여러 갈래의 고래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들개자리로 들어간 열기는 와류로 인해 그곳에 있던 차가운 공기와 열 교환을 한다. 이후 열기는 여러개의 고래로 서서히 균등하게 들어가게 돼 방 전체를 고루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고래로 넘어간 열기는 다시 고래 머리 부분의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또한번 열기의 이동 속력이 줄어들게 된다. 이곳의 열기 중 온도가 가장 높은 공기가 위로 올라가 구들장 바로 아래로 서서히 흘러가면서 구들장을 가열한다. 이로 인해 공기는 점점 냉각돼 결국 고래 바닥으로 내려오고 일부는 고래개자리로 흘러간다.


 

한편 냉각된 공기가 점점 고래 바닥으로 흘러 구들개자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뜨거운 고래개자리 부위와 만나 데워지고 다시 구들장 쪽으로 상승하게 된다. 고래에서 전체적으로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대류가 원활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고래의 모양 때문이다. 고래는 바다 속의 고래의 배를 연상시키듯 아궁이 쪽이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이것이 바로 이 부위를 고래라고 부르는 이유다. 따라서 고래 꼬리 쪽으로 갈수록 냉각되는 공기는 고래 바닥으로 흘러 내려가면서 어느 한 곳 에 머물지 않고 점점 낮아지는 고래의 머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좁은 꼬리 부분의 고래를 통과해서 넓은 공간의 고래개자리로 넘어간 공기는 또다시 이동속력이 줄어들게 된다. 여기서 여러개의 각 고래에서 나오는 다른 온도의 공기가 한데 모여 고루 섞이게 된다. 그러면서 온도의 고저에 따라 공기는 위아래로 분포하게 된다. 이때 남아있던 열기가 고래개자리 위 부분의 구들장을 가열하면서 서서히 실외 굴뚝개자리로 흘러가서 굴뚝을 통해 대기로 방출된다.


구들장 재료로 사용된 절연체 운모

 

 

구들의 독특한 구조는 가능한 열기를 내부에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베르누이의 정리나 대류현상과 같은 과학적인 원리가 잘 적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들의 독특한 구조는 가능한 열 기를 내부에 오래 머물 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베르누이의 정리나 대류현상과 같은 과학적인 원리가 잘 적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부뚜막에서 열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불주머니가 생기고, 구들개자리, 고래, 고 래개자리에서 열을 오랫동안 저장하는 열 주머니를 형성해 열기의 급속한 유출을 막는다.

 따라서 불 지피기를 그만둬도 열주머니에 머물러 있는 열기가 천천히 이동하면서 오랫동안 구들장을 가열해준다(그림 2).

한편 구들장이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데는 또다른 비결이 있다. 바로 구들 장의 재료인 돌이 어떤 종류냐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주위의 여러 돌 중 특별히 운모를 골랐다. 운모는 화성암과 변성암에서 흔히 발견되는 광물로 층상구조 로, 백운모, 소다운모, 흑운모, 금운모, 홍운모, 진발다이트 등으로 나뉜다. 이 중 특히 백운모는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이런 이유로 다리미 바닥 안에는 백운모가 들어있다.


 

바로 이것이 구들장의 재료가 된다. 절연체인 백운모 구들장은 아래의 뜨거 운 열기를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내뱉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구들 장인이 구 들장의 재료조차도 어떤 돌을 쓰는 것이 적합한지를 연구했다는 것이 놀랍기 만 하다.


 

이 외에도 장인의 세심한 면이 돋보이는 것이 있다. 구들장은 아랫목과 윗목의 두께가 다르다. 이는 아랫목의 경우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가깝기 때문에 너무 뜨거워질 수 있어 두꺼운 돌을 쓰고 여기에 진흙도 두껍게 바른다. 이 때문에 아랫목의 구들장은 많은 양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한편 윗목의 구들장은 얇게 해 빨리 가열되도록 했다.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를 줄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방이 식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궁이에서의 열 공급이 중단된 후에 아랫목에 저장된 열이 점점 방출되면서 고래에서의 대류로 인해 윗목의 구들장도 급속히 냉각되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적인 구들은 장인의 오랜 연구로 완성된 것이다.


머리 차게, 발 따뜻하게 그렇다면 구들은 다른 서구의 난방법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스팀(보일러) 난방, 스토부나 페치카 등은 바닥이 아니라 실내 공기를 직접 데우는 난방법이다. 이들에 의해 공기가 가열되면 실내에서는 대류 현상이 일어난다. 아래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데워져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워진 공기 가 위에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해서 상열하냉 구조의 온도 분포가 형성된다.

만약 사람이 서있다면 신체의 상위부인 머리 쪽은 고온이고 발 쪽은 낮은 온도가 되는 ‘두열족한’의 상태가 된다. 이는 건강을 위한 ‘두냉족열’ 상태와는 정반대다.
공기의 온도가 높아짐으로써 공기 중의 산소분자의 운동이 빨라져 부피가 팽 창하고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고온의 공기를 호흡하면 심폐내 산소분자의 수도 작아지게 돼 호흡 효과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구들 난방 법은 바닥을 데우는 것이므로 아래 공기가 따뜻하고 위 공기가 차다. 건강에도 좋은 난방법인 것이다.


 

현재는 시골에나 가야 아궁이나 굴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의 난방법이 바뀌었다. 그러나 방법은 바뀌었어도 아직까지 우리는 바닥 난방을 유지하고 있다. 고래가 파이프로, 고래 속을 지나던 뜨거운 공기가 보일러에서 데워지는 뜨거운 물로 대체된 온돌방에 살고 있다. 구들은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그 열이 사람에게 직접 전달되거나 방안의 공기를 데우는 장치로서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방식입니다.온돌난방은 멀리 고구려시대의 장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온돌로 점차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온돌 내부구조의 주요부분은 아궁이와 고래입니다.온돌은 연료가 아궁이에서 타서 부넘기를 통해 열과 연기를 고래로 이끌어 들이는 구조로 방고래로 들어가면서 급경사를 이루어 높아지다가 다시 약간 낮아지는 부넘기가 있습니다.부넘기는 불길을 잘 넘어가게 하고 불을 거꾸로 내뱉지 않도록 합니다.고래는 열과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로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불길이 고래에서 굴뚝으로 연결되기 전에 고래보다 깊이 파인 골이 있어 재나 연기를 머무르게 하는데 이를 개자리라고 합니다.여기에 열과 연기가 머물다가 굴뚝으로 빠져나가므로 구들의 온기를 더욱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온돌의 좋은 점

첫째 난방 효과온도가 큽니다.인체가 방바닥에서 나오는 열을 받을 때, 인체가 느끼는 온도가 실제온도보다 높기 때문입니다.따뜻한 아랫목에 있을 때 느끼는 온도가 실제 온도보다 높다는 얘기입니다.둘째 아랫목이 따스하기 때문에 머리는 차갑고 발은 따뜻한 구조로 혈액순환에 도움이 됩니다.셋째 과열되거나 불이 염려가 없습니다.넷째 실내에서 재나 먼지가 나오지 않습니다.장판과 온돌을 사용하면 먼지가 쌓이는 경우가 드물고 온돌이 열을 고루 발산해 실내 공기가 건조해져서 알레르기 환자도 덜합니다.

고래의 종류

       

고래의 이름은 모양에서 따온 것으로, 될수록 열이 분산되어 구들이 골고루 따뜻하도록 고안하였습니다.화살표는 열과 연기가 지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굴뚝의 종류

 

남방식 굴뚝                               

    

북방식 굴뚝

 

남쪽지방은 북쪽보다 따뜻하기 때문에 아궁이에서 온 열이 굴뚝으로 쉽게 빠져 나갈 수 있게 사진과 같이 아예 굴뚝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러나 북쪽지방은 조금이라도 따뜻한 열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사진과 같이 굴뚝을 높게 만들어 열도 보호하고 바람이 고래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남/북남 지역의 굴뚝이 다른 까닭은?

 아궁이와 구들은 어느지방이나 거의 비슷한 형태지만 굴뚝은 지역에따라 큰차이를 보인다.

북방지역은 열도 뺏기지 않아야 하고 서북풍이 역류해도 안된다.그래서 굴뚝을 어디에 두느냐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굴뚝을 그냥 외기에 노출시키지 않게 두껍게 감싸 외기를 차단하고 개자리를 파서 열기가 더 머물뿐아니라 역풍이 들어와도 차단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남방지역은 북방지역보다 훨신 따뜻한 기후로 굴뚝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가 없었다. 점차 위축이 되어간다.
심지어는 고래끝에 구멍날을 내어 개굴을 노출시키는 너무나도 다른 형태의 굴뚝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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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은 아궁이에서 장작이나 짚 등을 연소시켜, 그 연소공기를 바닥 밑으로 보내 연도와 굴뚝을 통해 외기로 배출시켜서 바닥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복사난방방식으로, 연소부분인 아궁이부, 채난부분인 고래부, 배연부분인 굴뚝부로 구성된다. 온돌은 아침,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을 데워두고 그 축열에 의해 일정시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온돌아궁이를 이용, 취사를 하는 부뚜막은 부엌에 만들어지며, 안방과 접한 벽쪽에 만들어짐으로써 안방구들이 아궁이와 겸용으로 축조된다. 그러나 사대부가와 농가에서 건넌방과 같은 부엌과 따로 떨어진 아궁이에 부뚜막을 만들고 솥을 거는데, 이는 더운물을 끓이거나 소죽을 쑨다든가 하는 것으로 부엌간 부뚜막의 보조용으로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대가에서 반빗간이 독립될 때는 안방의 아궁이에는 부뚜막을 만들지 않고 그 자리에는 아래층은 안방에 불때는 아궁이를 둔 함실로 하고 위층에는 누마루를 놓아 안방마님의 여름거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부엌간의 부뚜막이 안방구들의 아궁이와 겸용으로 축조되었으므로 여름철의 조리를 위해서나 부엌의 보조용으로 한데부엌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5-1-b] 방 전체 온돌의 구조


1) 연소부분

■ 아궁이(분구, 화구, 곡구락, 취구, 솥자리, 부넹기)
불을 피울때 공기와 연료를 공급하고, 불을 잘 타게 하기 위한 부지갱이의 사용통로로 연소상태 확인이 가능. 연소가 잘 되려면 산소의 공급이 잘 되어야 하므로 아궁이는 부엌바닥과 같게 낮추고, 앞이마도 낮춰 연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 부뚜막 후렁이(불주머니, 화상, 연소실)
아궁이에서 공급된 공기로 인해 연료가 연소된 후 급격히 체적이 팽창될 경우 이를 완화시켜 주고, 불꽃표면에 산소를 원활히 공급, 밑에서 위로 유체의 흐름이 좋게 유선형으로 되어 있고, 연소시의 팽창압력으로 부넹기로 유입.

■ 불고개(불넘개, 부넹기, 불목)
부뚜막 후렁이와 구들 개자리를 연결하는 통로. 양쪽의 압력차에 의해 열기의 흐름을 조절하며, 굴뚝에서 오는 역풍도 막아준다.


2) 채난부분

■ 구들개자리
연소시 흡입되는 재를 갈아 앉히며, 개자리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연소공기의 속도에 영향을 주어, 연소가스의 흐름을 조절한다.

■ 고래
굴뚝쪽은 높고 구들 개자리쪽은 낮아서 저온의 연소가스가 고래바닥으로 내려오고, 고온의 연소가스는 상부로 다시 올라가며 축열된다. 주로 돌(각석 혹은 편석)과 진흙을 섞어서 쌓는다.

■ 구들장(온돌석, 방장)
연소가스에 의해 가열되어 축열을 한다. 주로 화강암 판석을 사용하며 아궁이에서 가까운 부분은 낮게, 먼 부분은 높게 설치하여 아궁이 가까운 곳은 점토를 두껍게 바르고, 먼 곳은 얇게 발라 바닥온도를 균일하게 하도록 한다. 특히 구들 개자리를 덮는 큰 구들장을 이맛돌이라 한다.

■ 고래개자리(개고래, 가루고래, 언골, 도구, 회골, 머리골)
연소된 재를 갈아 앉히며 그 크기에 따라 연소공기의 속도에 영향을 주어 연소가스의 흐름을 조절한다.

■ 자갈, 세석
구들장 위에 진흙 반죽을 덮어 깔되, 구들장 사이의 구멍을 잔돌로 메워 진흙이 고래로 새서 빠져 나가지 않게 한다.

■ 부토
마른 진흙을 세석 위에 부어 부토 후 밟아 다지고 수평이 되도록 한후, 초새 및 재새를 한다.

■ 초새(초벌 바르기), 재새(재벌 바르기), 마감바르기
진흙 반죽을 흙손으로 초벌 바른 후, 완전 건조된 뒤 다시 중벌 바르기를 하며, 마지막으로 진흙을 물에 타서 진흙앙금을 만들거나 진흙을 채로 쳐서 세사를 써서 반죽하여 수평한 진흙 피막이 형성되도록 바른다.


3) 배연부분

■ 굴뚝개자리
연소된 재를 갈아 앉히며 그 크기에 따라 연소공기의 속도에 영향을 주어 연소가스의 흐름을 조절한다.

■ 연도
진흙을 두껍게 바르고 볏짚을 엮어 보온하여, 열을 뺏기지 않도록 하며, 연기의 배연통로로서 작용한다.

■ 구새(굴뚝, 연돌, 연통)
연기의 급속한 방출을 막고 비나 눈이 들지 않게 하며, 구들 안에 있는 열기의 최종배출구이다.

■ 소제구멍


[5-1-a] 방 전체 온돌의 평면 및 단면 구조와 명칭

 

 

 

굴뚝도 아주 중요하다
또 중요한 것이 굴뚝인데, 굴뚝은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필 때 생기는 연기를 뽑아내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므로 굴뚝 시설이 좋아야 아궁이에 불이 잘 들고 방이 따뜻했다. 굴뚝을 세울 때 우선 멍에골에서 밖으로 멍에골 깊이보다 좀 얕게 굴뚝골을 내고 그 끝에 좀더 깊게 개자리를 파며 그 위에 흙담 또는 돌담으로 원추형 혹은 사각주형에 가까운 형태로 굴뚝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굴뚝의 높이는 거의 처마 밑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축조한 굴뚝 위에 나무구새통과 같은 것을 세워 놓아 그 높이가 지붕마루 높이와 같게 하거나 그 이상 높게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지면에서 몇 개의 돌을 이용하여 낮게 축조하거나 구새통만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지형조건을 고려한 것이다. 주로 산간지대에서는 굴뚝을 지붕마루보다 높게 세우고 야산지대에서는 굴뚝을 지붕 처마 높이와 비슷하게 하거나 그보다 약간 높게 하였다. 이것은 산이 높은 곳에서는 굴뚝이 높아야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아 불이 잘 들고 산이 낮은 지대에서는 굴뚝이 높지 않아도 불이 잘 들기 때문이다. 굴뚝의 형식과 재료 등에서 차이는 지방의 지형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온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 방식인 그들의 따뜻한 아랫목은 온가족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자리였다. 침대 생활을 하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런 아랫목 문화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190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한국 사람들은 밤마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구들은 방의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체인 동시에 난방을 위한 시설.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체에는 구들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난방적 요소가 짙은 것으로 남쪽지방에서 발전하여 북쪽지방으로 퍼진 반면에 구들은 추운 북쪽지방에서 발달하여 차츰 남쪽지방으로 보급된 것으로 한옥에 정착되기 이전에는 제각기 형성되었던 이질적 건축시설이다.

구들은 방바닥을 골고루 덥게 해주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기거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며 화재에도 안전한 이상적인 채난법인 방바닥 축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내공기가 지나치게 건조되기 쉽고 불을 떼지 않는 여름에는 바닥의 습기가 상승하여 눅눅하게 되는 결점이 있으며, 구들을 잘 놓지 못하면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거나 견열이 생겨 연기가 누출될 우려가 있다.

 

 

◆ 역사

 

우리 나라에서 구들이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함경북도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발견된 구들의 흔적을 예로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불확실한 단계의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그때 구들의 구조법이 시험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 문헌 <구당서>에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구덩이를 길게 파고 밑에서 불을 때서 따뜻함을 유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구들을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적인 특색으로 표현한다.


백제에 관한 기록에는 구들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다락집이 있어 거기에서 기거한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남방주거형식의 특색을 보이고, 고구려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북방주거의 특색을 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조령원구기의 발굴조사 때 고려시대의 건물터에서 구들고래의 시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이미 구들이 소백산맥의 남쪽지역에까지 설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북방의 구들이 그만큼 남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조선초기에 들어와서는 구들이 조령을 넘어 남부지방으로 남하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밝혀주고 있다. 즉 선산, 상주, 안동 등지의 관아와 궁실에 관계되는 건축물들이 보수되거나 신축된 사실을 기록한 초중창 중수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이것은 구들의 전파가 분명히 남부지방에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이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구들의 전파는 북방, 즉 한양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을 위하여 지어진 건물에 먼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뒤에 백성에까지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구들전파의 예는 제주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15세기 말엽에 벼슬한 제주 출신의 고득종이 기록한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방에 설치했다지만 비슷한 식의 사항을 기록하였다고 인정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의 집에는 아궁이와 구들이 없어 땅바닥에서 잔다"고 되어 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도 제주도 민가에는 구들이 없다고 되어 있다. 이익도 같은 기록을 하면서 이익이 살고 있었던 시절에 제주도 민가에 비로소 방 하나 정도에 구들 시설이 존재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집에 구들이 보급되기 1-2세기 전에 관리들의 집에는 구들이 설치되었던 것이므로 선산지방일대의 경우도 관리들에 의하여 선도되고 백성들에게 보급된 것은 그보다 뒤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중앙관리가 향리에 돌아와 사는 집이나 궁실에 연관된 사찰 등에는 구들 놓은 방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구들은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활용되기도 하고,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한방 치려법 가운데 '두한족열'이라고 해서 발을 덥게 하고 머리를 차게 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선조들은 일찍부터 차가운 윗목에 머리를,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두고 자는 지혜로움을 발휘했다. 옛날에는 며느리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며느리가 지어 오는 밥상의 훈기를 척도로 삼았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밥이나 국, 찌개, 숭늉을 알맞은 온도로 올려야 했는데, 법도 있는 집에서는 그 기준을 "아랫목 더위를 조금 밑돌거나 윗돌아도 나쁘다"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뜨거운 밥은 미리 퍼서 아랫목에 묻어 두었고, 뜨거운 국은 뜨뜻한 부뚜막에 올려 온도를 낮추었다가 상에 올리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집들은 서구식 공기 난방으로 바뀌고 있다.

 

 

◆ 종류 및 구조

 

구들의 종류는 불아궁(부뚜막), 고래의 형식, 축조재료, 연료, 굴뚝 및 구들 고래의 형식 등에 따라 나눌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래의 형식이다. 고래의 형식에 따른 유형으로는 선자구들, 쇠구들, 토관구들 등이 있다.

 


구들은 불아궁이, 구들고래(방고래), 개자리, 연도, 굴뚝의 각 부분으로 구성되며 모두 불연재로 축조되어야 한다. 불아궁과 굴뚝의 배치는 한 방의 주위벽에서 서로 먼 위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고 구들과 굴뚝을 연결하는 연도는 될 수 있는대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불아궁과 굴뚝연도까지 도랑 모양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것을 구들고래 또는 방고래라고 하며,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히는 것을 두둑이라고 한다.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낸 고래를 개자리라고 한다.

 


개자리는 구들고래가 끝나는 주위의 벽과 고막이 안에 깊게 만든 고래로서 대개 불아궁의 반대편 벽쪽에 만든다. 굴뚝 밑에 깊게 만든 곳은 굴뚝개자리라고 한다. 고래는 아궁불목에서 가장 낮게 되고 방의 갓둘레 개자리 부근에서 가장 높게 되므로 고래를 켤 지면은 그 경사에 맞게 고르게 다져야 한다. 지면을 계획한 고래의 형태로 파낸 다음 옆에 두둑을 쌓은 일을 고래켜기라 한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고래에는 나란히고래, 허튼고래, 선자고래 등이 있다. 나란히고래는 고래와 두둑의 너비를 거의 일정하게 평행으로 만든 것이고 선자고래는 부채살처럼 된 것으로 불목에서는 좁고 개자리족에서는 넓어진 형태이다. 허튼고래는 불목에서 개자리쪽으로 연기가 흘러들기 좋도록 땅바닥에 경사면을 만들어 다진 다음, 두둑을 쌓지 않고 구들장의 네귀가 올라 앉을 동바리돌 또는 벽돌을 쌓아 만든다. 따라서 허튼고래에 쓰이는 구들장은 일정한 크기의 네모난 것이어야 동바리들을 가로 세로 정렬로 배치할 수 있다.




  전통온돌(구들)놓기(3) - 아궁이/굴뚝

 

정한 규격에 맞춰 벽돌을 쌓아 아궁이와 부뚜막을 만든다.

아궁이후렁이는 안쪽이 유선형이 되게 만들어 불이 솥을 감돌아 부넹기로 잘 들게 한다.

함실구들의 경우, 불을 때는 함실이 구들장 아래에 있으므로 부뚜막이 없다.

 

 

 

 

 

 

 

* 중벌바르기 한 것이 건조되면서 생긴 금을 흙손으로 잘 물리도록 누르면서 얇게   마감바르기를

  한다.

  마감바르기가 끝나면, 표면갈기, 장판지바르기, 콩댐하기의 과정을 거쳐 완성한다.

 

전통온돌(구들)놓기 (2) -  구들장 놓기/건조

 

아궁이쪽인 구들개자리로부터 고임돌을 놓으면서 구들장을 덮는다.

구들개자리 위에는 넓은 구들장을 놓는데 이맛돌이라 부른다. 아맛돌에는 부넹기로 넘어온 불이

직접 닿으므로 불에 깨지지 않는 회돌(감람석)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굴뚝에도 비교적 큰 구들장을 먼저 덮는다.

구들장을 덮을 때 구들장과 구들장 사이는 잔돌(새침돌)로 새침을 한다. 구들장을 다 덮으면

된 진흙반죽을 내리쳐서 구들장과 구들장 사이, 돌과 돌 사이에 진흙이 완전히 들어가게 새침한

다.

 

 

 

부토 또는 초벌바르기 : 구들장 위에 반죽하지 않은 진흙을 깔고(부토) 밟아서 잘 다진다. 이때

부토 대신 짚을 섞은(적심) 진흙반죽으로 초벌바르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부토 또는 초벌바르기

는 수평이 되게 한다. 

 

 

 

 

 

건조시키기 : 중벌바르기를 한 바닥이 굳도록 불을 넣어 금이 갈 정도로 충분히 건조시킨다.

구들이 잘 놓인 것은 윗목부터 골고루 건조되므로 이때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충분히 건조 시키지

않으면 방바닥에 깐 장판이 썩는다.

 

 

 

전통온돌(구들)놓기 (1) - 구들개자리/부넘기/함실/고래둑

 

구들을 놓기 위한 자재가 준비되면 구들 마름질에 따라 먼저 하방 밑 채우기를 하여 하방을

잘 정리한후 다음 차례대로 구들을 놓고 구들방을 완성한다.

                      구들개자리와 부넹기, 고래바닥 만들기(부뚜막 구들)

 

                                          함실과 고래바닥 만들기(함실구들)

 

                                                         고래개자리 만들기

 

                                                            굴뚝개자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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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둑 만들기

 

                                              고래바닥의 기울기 확인하기

 

                                             

 

 

 

다양한 전통구들의 종류

 

1) 방과 아궁이의 기능에 따른 분류

  - 한 방 한 아궁이 구들 : 방 하나에 아궁이가 하나로써 가장 일반적인 구들이다.

  - 한 아궁이 여러 방 구들 :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두 개 정도의 방을 지나 굴뚝으로 열기가

     나가는 구들로써, 추운 지방에 많다.

  - 겹집구들 : 아주 추운 지방의 겹집(쌍통집)에 많다. 한 아궁이 여러방 구들이 겹쳐져 있는

     형태로써, 이웃방의 구들과 연결되어 있다.

2) 아궁이 위치에 따른 분류

  - 집 안에 아궁이가 있는 구들 : 아궁이가 정지 또는 부엌에 있는 구들로써 취사를 같이 한다

  - 집 밖에 아궁이가 있는 구들 : 난방이 주된 목적으로 집의 바깥인 처마안에 아궁이가 있는

     데 사랑방이나 골방, 행랑채 등에 주로 있다.

3) 아궁이 형태에 따른 구들

  - 함실구들 : 부넹기와 구들개자리가 없이 함실에서 직접 열을 공급하는 것으로 숯불을 함실

     에 넣는다.

  - 부두막 구들 : 부뚜막에서 열을 공급하므로 구들개자리와 부넹기가 있고, 부뚜막에 솥을

     거는 경우가 많다.

4) 구들개자리에 따른 분류

  - 구들개자리가 있는 구들 : 부넹기 아래를 1자반 정도 깊이로 파서 열기를 잘 빨아들이게

     한 구들로 큰 방인 안방에 많다.

  - 구들개자리가 없는 구들 : 한방 한 아궁이 구들에 많다.

5) 고래의 형태에 따른 분류

   살립집의 배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 방 크기 등과 더불어, 기후

  조건이나 기술자의 취향 등에 따라 고래의 형태가 달라진다. 

  - 허튼고래구들 : 고래둑이 귾어져 있어 열기의 좌우이동이 자유롭다

  - 곧은고래구들 : 고래가 굴뚝으로 곧게 나 있어 열기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고래둑이 대칭으로 된 것보다 비대칭으로 된 것이 열 흐름에 좋고 축열량도 많아진다.

  - 대각선고래구들 : 아궁이와 굴뚝이 대각선에 있는 경우에 대각선 방향을 주 고래로 하여

    놓는다.

  - 굽은고래구들 : 아궁이와 굴뚝이 대각선에 있는 경우에 고래를 구부러지게 놓아 열기를

    한쪽으로 모은 후 굴뚝으로 내보내는 방법이다.

  - 부채고래구들 : 아궁이에서 고래가 부챗살 모양으로 퍼지도록 놓아진 구들로써 열기의

    이동이 빠르고 윗목이 따뜻하다.

  - 여러아궁이구들 : 한 방에 아궁이가 여러 개 있는 경우 굴뚝을 향하여 고래를 줄지어

    놓는데, '줄고래구들'이라고도 부른다.

  - 되돈고래구들 :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방향에 있는 경우로 열 보존이 잘되므로 연료절감

    이 된다.

  - 복합고래구들 : 구들 장인의 기술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고래형태를 조합하여 놓는 구들

    로, 무척다양하다.

 

 

 

전통구들의 구조와 용어

 

구들구조의 각 부의 용어는 지방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

 

1) 아궁이 : 구들에 소용되는 연료 및 공기의 공급구이며 아궁이후렁이에 접하고 있다.

2) 아궁이후렁이(불목) : 연료를 연소시키는 곳으로 내벽이 유선형으로 되어 있고 아궁이를

    통하여 투입되는 연료와 공기를 연소하여 열을 발생시키며 발생된 열을 부넹기로 보낸다.

    이곳에 솥을 걸게 되면 솥의 모양이 형태를 결정한다.

3) 부넹기(부넘기) : 아궁이후렁이에서 발생된 고열을 받아 '벤츄리(venturi)' 효과로 구들개

    자리에 유입시킨다. 구들개자리와 아궁이후렁이의 온도차로 생기는 기압차가 부넹기에서의

    유입 속도를 자연조절한다.

4) 구들개자리 : 부넹기로부터 빠른 속도로 유입되는 열기의 속도를 확산와류(擴散渦流)현상

    으로 급격히 줄이면서 열기를 고래로 균등히 공급한다.

5) 고래 : 구들개자리에서 공급되는 열기를 각각의 고래가 받아서 내굴길을 통해 고래개자리로

    보낸다. 고래둑과 고래둑사이의 공간.

6) 고래개자리 : 고래에서 유입되는 열기는 고래개자리에서 합쳐지면서 각 고래의 유입량과

    속도가 자연 조절된다. 여기서 남은 열은 모두 구들에 남겨지고 연기는 굴뚝으로 내 보내

    지게 된다.

7) 연도 : 내굴길을 통해 고래개자리에 모인 연기를 굴뚝으로 연결해준다.

8) 굴뚝개자리 : 연도를 통해 배출되는 연기의 속도를 조절하여 굴뚝으로 보낸다. 굴뚝으로

   들어오는 찬공기를 막아주고 빗물이 굴뚝으로 들어가는 것도 막아준다.

9) 굴뚝 : 굴뚝개자리에 있는 연기를 외기(外氣)로 배출한다.

    *굴뚝을 구새로, 연도를 굴뚝으로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그림참조).

10) 굄돌 : 구들장이 움직여지지 않고 반반히 놓아지도록 구들장 밑에 받치는 돌.

11) 구들장 : 고래뚝 위에 놓는 판석으로 방바닥을 이루게 되고 아울러 축열도 되는 중요한

    곳이다. 불이 들어오는 아랫목은 두꺼운 돌을 쓰고 윗목은 얇은 돌을 쓴다.

12) 불맞이돌(영화석迎火石) : 불맞이돌은 굴뚝의 맞은편 구새에 끼웠다 뺏다 하는 돌로써

     구들개자리에서 각각의 고래로 유입되는 열기의 속도와 양을 조절한다.

13) 바람막이(역풍장逆風障) : 고래에서 유출되는 열기의 속도와 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굴뚝을 통해 갑자기 들어오는 역풍을 차단하는 기능도 한다. 구새의 중간에 판을 끼워서

     사용한다.

14) 내굴길 : 고래뚝사이의 공간으로 각각의 고래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고래개자리의 연기를 굴뚝으로 통하게 해주고 아궁이에서부터 고래개자리까지의 열기

     의 흐름을 조절한다.

15) 구새갓(煙架) : 굴뚝(구새)속으로 눈이나 비가 들어가지 않게 굴뚝(구새)의 끝에서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회오리바람의 반대적 현상인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부는 '하늬바람'

    을 차단하여 구들의 역풍을 완화시킨다.

16) 부뚜막 : 아궁이, 아궁이후렁이, 솥자리 등으로 조합.형성된 부분이다.

17) 함실 : 부뚜막을 두지 않는 구조에서 방바닥 밑으로 직접 불을 때게 만든 아궁이.

18) 사춤돌 : 구들장을 놓은 다음 그 사이에 끼워 메우는 작은 돌.

19) 시근담 : 구들장을 걸치기위해 고막이 안족으로 내어 쌓은 고래둑.

20) 거미줄치기 : 구들장 사이의 틈을 사춤돌로 채우고 진흙으로 메워 바르는 것.

 

 

 

A 김준봉,라신호(온돌,그 찬란한 구들문화)에 의한 용어 

 

          

 

 

 

 

 

B 문화재수리표준시방서의 용어


 

매화구들   |   복층구들   |   원형구들 ( 돌출형 )   |   원형구들 ( 매립형 )
격구들   |   십자(+)구들   |   자구들 / 살골구들   |   효소구들 (4종류)   |   열(태양)구들(3종류)

   매화구들 이란?

이름처럼 아름다운 황제구들이라 합니다. 여러 가지 한약재를 이용하여 구들을 놓는데 한 약을 달여 먹지 않고 피부와 호흡으로 간접 섭취하는 구들이 바로 매화구들 이다. 난치병 등 치료용 구들이며, 그 약재에 따라서 피부미용, 비만, 등 각종질병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특히 현대 문화 속의 다양한 질병을 열에너지를 통한 삽투압 방식의 구들 치료 방이며 개인전용 환자 방에 매화구들을 시공해 일부 사용중이고 환자가 아닌 휴양을 목적으로 하는 분들 또 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현재의 황토타운이나 찜질 방 등에도 매화 구들로 대체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매화구들은 한약 값 등으로 초기비용이 조금 더 들어가지만 구들로써 효능은 최고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화 관광산업에 매화구들은 전통문화의 자랑거리로 자리 매김 하리라 본다.

   복층구들은?

복층구들은 2층 구조의 구들인데 열 효율성이 뛰어나고 한번가열로 약1달간 구들이 식지 않는 특징이 있다. 복층 구들의 특성은 열효율이 상대적으로 오래 보관되어 찜방이나 장기요양 환자의 병실로 사용을 많이하고 열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키는 장점이 있다. 2층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시공하기가 까다롭다 는 게 단점이지만 열 효율성을 생각하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시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동시설에 매우 효과적인데 효율성과 관리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원형구들 (돌충형)

원형구들 돌출형과 매립형은 황토집 짓기 교육을 할 때 교육생들에게 가장 많이 교육을 시키는 구들인데 구들 놓기가 일자로 대칭 되게 하고 지층이 암반 , 수로 등으로 터파기가 곤란한 지형에 설치하는 구들이 돌출형 원형구들이다. 구들이 일정한 대칭을 이루게 놓는 기법이며. 고임돌의 회전식을 각별히 주의하여 놓지 않으면 구들방의 절반이 열전도의 차이가 심하다. 다른 구들들도 마찬가지지만 원형구들의 최대 장점은 온도가 골고루 전달되어 윗목, 이랫목 없이 열전도가 같다.

   원형구들 (매립형)

원형구들 돌출, 매립형은 황토집 짓기 교육을 할 때 교육생들에게 가장 많이 교육을 시키는 구들인데 구들 놓는 방식을 배우고 나면 누구나 손쉽게 시공할수 있다. 구들시공 방법이 매우 쉽고 효율성이 뛰어나 어떠한 방 모양에도 원형으로 구들을 놓을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매립형 원형구들은 영업을 위주 하는 상가나 일반 개인 집에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놓여지는 데 이유는 굴뚝 인테리어가 용이하고 굴뚝 방향 위치를 자유 자재로 설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른 구들들도 마찬가지지만 원형구들의 최대 장점은 온도가 골고루 전달되어 윗목, 이랫목이 없이 열전도가 거의 같아 한겨울에도 열량이 오래 보존된다.

   격구들

격구들은 기존의 3칸, 4칸 한옥집에 설치하거나 방의 구조가 길게,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건축 구조에 맞게 고안되어 민박집이나 찜질방 등에 효율적이다. 격구들은 다수의 방을 한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3 - 5개의 방을 골고루 따뜻하게 하는 공법의 구들이고 대형 강당 등에도 시공하면 열효율이 좋다. 현대식 건축구조인 대형공간에 격구들이 가장 좋게 평가되고 있다.

   십자(+)구들

십자구들은 +자형 구들인데 지리산 칠불암에 놓여진 아자방과 비슷한 공법으로 시공되며 방의 중심부와 각각의 배치구조가 +자형의 건축 구조에 많이 쓰인다. 정각 , 누각 등에 시공하여 겨울철에도 사용 할수 있도록 고안된 구들공법이다. 사각의 대칭구조 방에 시공하여 사용한다. 십자구들의 특성은 구들의 두께가 약 45cm이상의 두께로 시공하는 게 특징이다. 한번 불을 지피려면3일 밤낮을 지피며 그 열량의 보존은 15일 - 50일 동안 유지된다.
   자구들 / 살골구들

자구들, 살골구들은 기존의 재래식 구들을 말하는 것이며 설치하기가 편리하고 구조도 간단하다. 우리나라 서민들의 대표적인 구들인데 회골 설정과 회굴 설정이 간단하지만 정교하게 설치하지 않으면 온도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 회골과 회굴(개자리) 의 깊이와 불목의 높낮이를 2/3로 설정해야 아궁이 불이 잘 들어간다. 골과 불목의 위치에 따라 열차단막을 일정한 비율 45도 각도를 유지하여 시공한다.

   효소구들 (4종류)

효소구들은 치료 및 훈증용 구들인데 각종 피부병 등에 사용될수 있도록 고안된 구들이다. 효소 구들은 말 그대로 황토와 함께 한약재와 곡류를 첨가해 발효시켜 사용하는 일종의 훈증요법의 구들이다. 효소구들은 돌 구들이 아니며 재래식 방법으로는 항아리를 이용하여 사용하였으나 최근에 는 항아리의 불편한 점을 보완하여 현대식으로 개량하여 스텐레스 등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효소구들은 훈증을 이용한 구들이다.

   열 (태양) 구들 (3종류)

태양열을 이용하는 구들로써 집열판에서 전기 공급 없이 열 전도선을 타고 직접 열을 공급하는 장치로 시공비외 난방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전천후 구들이라 할수 있다. 전기가 전혀 필요치 않은 난방이야말로 황토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연구 소재이다. 계속적인 연구와 실험중이며 태양열 구들연구가 완성되는 대로 발표할 예정이며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를 도와줄 분들도 찾고 있습니다. 에너지연구 기자재 도움 주실 분들의 많은 후원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옥기술의 결정체, 온돌문화

언젠가 어른들의 말과 요즘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맞히는 TV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었다. 그날의 제목은 ‘구들’을 맞추는 시간이었는데, 청소년들의 답변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 흔하게 듣던 구들이란 단어를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압권이었던 것은 ‘늙은 푸들강아지’라는 말까지 듣고는 더 이상 할말이 잃고 말았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한옥의 상징이던 온돌문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구들이란 방의 바닥을 이루는 부분이 된다.

구들에는 구들장이라는 널돌과 그 위에 덮여진 황토 흙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옥의 난방과 여름 장마철에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제거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지닌 우리민족만의 주거문화이다.

예부터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난방에 대한 부분이었다. 혹한기를 살아야 했던 옛 선조들에게 있어서 난방이란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화려한 집을 지었다고 해도 난방이 제대로 갖추어지질 않으면 그 집은 가축우리로나 사용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아궁이로부터 시작되는 난방부분은 구들을 거쳐 굴뚝에 이르기까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옥에서는 아궁이에는 필히 부뚜막이 동반되었다. 취사와 난방을 같이 사용하였기에 열효율을 그만큼 높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작되는 열은 방의 밑 부분인 방 골이라는 부분을 거치면서 난방의 역할을 한다. 아궁이에서 시작된 방 골은 부채 모양으로 방 전체에 퍼지면서 방을 이루는데 맨 윗 쪽에서 다시 모여서 굴뚝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골 위를 구들장으로 덮고 그 사이를 황토를 이겨서 사이사이를 발라 연기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방바닥이 되는 부분은 고운 황토로 곱게 바르면 일 단 방의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구들장은 아궁이 쪽은 더 두꺼운 구들장을 사용하고 위에 바르는 황토도 더 두껍게 바르고 위쪽으로 갈수록 얇은 구들과 그 위에 황토도 얇게 바른다. 그래서 위쪽 얇게 바른 부분은 윗목이 되는 것이고, 아래쪽 두껍게 바른 부분은 아랫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바닥은 평평해야 하므로 방 골의 모양은 위쪽과 아래쪽의 높이가 달라 불길이 더욱 잘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열이 전체적으로 골고루 퍼지게 만들었고, 한번 달구어진 구들장은 오랫동안 열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과학적으로 열을 이용하였고, 그 열을 난방에 적절하게 이용한 우리선조들의 지혜가 집약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들에 사대부집들은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가며 몇 겹으로 방바닥을 완성하였지만, 일반서민들은 그냥 방석을 깔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반서민들이 바닥에 깔았던 방석이 가장 난방에 좋다는 늪지의 부들이라는 풀을 엮어 만들었는데 이 풀의 성질이 따스하여 소한추위에 사대부머슴은 얼어 죽어도 초막에 거지는 살아남는다는 말이 생길정도로 난방에는 탁월하였다.

아무튼 온돌이 이렇게 만들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가장 허름하게 만들어지는 굴뚝은 집을 짓고 난후에 대충 남은 자재들로 만들기 일쑤였다. 이 굴뚝이 얼마만큼 연기를 알맞게 빨아내어 하늘로 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너무 빨아내지 못하면 아궁이로 연기가 역류하여 불을 지필수가 없었다. 또 너무 잘 빨아내면 그 속에 열을 같이 빨아내어 방이 따스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굴뚝이 잘 만들어지면 ‘불길이 든다’라고 표현하였고 잘못 만들어지면 ‘불길이 난다’고 표현하여 그의 기술을 평하였다. 우리나라의 기온도 사계절에 맞추어 발달된 온돌문화는 우리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문화이지만 간편한 서양문화에 밀려 이제 서서히 잊혀지는 듯한 느낌이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통온돌의 형성과정

 

역사적 시대별로 문헌기록과 유적, 유물간의 상호 비교, 분석을 통하여 전통온돌의

변천과 형성과정을 온돌 자체의 변천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크게 5단계의 변천과정
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시기별로 대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로시대(B.C.5000~B.C.2000)

이 시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초기까지로 주거의 중앙에 로를 1개두고 취사와 난방을 겸하였으며, 그 주위에 냇돌이나 할석 혹은 점토대를 둘러 노 주위에 난방 시 잔열효과를 이용하기 위한 축열체를 두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취사와 난방이 분리가 안되었지만, 서포항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난방과 취사를 분리한다는 개념은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봅니다.

  2) 이로 및 초기형 부뚜막(화덕)시대(B.C.10C~B.C.4C)
청동기 및 철기시대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로지가 주거지 한쪽에 치우쳐 2개 이상 있게 되는데, 중앙의 로는 난방용으로, 또 다른 하나는 벽에 근접하여 취사를 위한 로로 정착되게 됩니다. 중앙의 로는 열 이용의 측면에서 전 시대와 같이 돌과 진흙으로 보강하여 잔열을 이용했는데 점차 로의 바닥에 판석을 깔아 축열효과를 한층 높이도록 하였으며, 벽쪽에 있는 취사용의 로 역시 둑모양의 로지형태로 바뀌어 점차 단순한 로의 개념에서 배연이 가능한 부뚜막의 형태로 발전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3) 하향식 구들과 부뚜막시대(B.C.4C~기원전후)
철기시대초기부터 원삼극시대초기의 시기로 중앙의 로가 전 시대에는 진흙이나 돌로 보강하거나,바닥에 판석을 깔아 축열효과를 증대시켰으나, 점치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또 진흙을 덮고 그 주위에 큰 돌을 세워 놓음으로써 축열효과를 이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설들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온돌은 축열체를 밑에서 하향으로 덥혔지만 이 시기에는 축열체 위에서 불을 피워 하향으로 덥혔거나 측향면에서 덥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소위 온돌에 대용되는 재료, 즈 돌과 진흙등 잔열 유지효과가 좋은 재료가 쓰이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벽 쪽에 있는 취사용의 로 역시 둑모양의 로지형태에서 진흙둑으로 만든 화구형태로 나타나기전 시대의 둑모양 로지에서 연소부와 배연시설을 갖춘 터널형 구들(부뚜막 형태)로 정착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볼 때 아직 취사와 난방은 분리되어 있으며, 이는 하향식 축열체를 가진 중앙의 로와 배연시설을 갖춘 벽 쪽의 로가 아직 연소부분(아궁이부), 축열층이 있는 연소부분(고래부),배연부분(굴뚝부분)을 가진 오늘날의 온돌과 같은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두 가지 기능이 분리가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ㄱ자형 및 ㅡ자형 구들시대(B.C.4C~A.D.11C)
철기시대초기 이후부터 고려시대초기까지의 시기로서 북쪽의 추운지방에서부터 기능별로 분리하여사용하던 중앙의 난방용 하향식 로와 벽쪽의 취사를 위한 배연시설을 갖춘 터널식 로는 이 두가지 기능이 합쳐져서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가능한 외줄구들로 변하게 되는데(즉 중앙의 축열효과를 고려한 난방용 로와 벽쪽의 부뚜막이 합쳐지며, 취사와 난방이 결합되어 실내에 아궁이가 위치한 입식생활형태), 차츰 벽선을 따라 4자로 꺽어 구들길이를 연장하고 연기가 역류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ㄱ자형 그들은 초기에는 외고래나 두고래 정도의 간단한 형태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고래의 줄수가 늘어나고, 한 주거지 내에 ㄱ자형 구들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며, 고래의 줄수도 2~3줄이상이 되며, 취사용으로 독립된 부뚜막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데부엌’의 시원적인 모습이 이때부터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인 분포를 보면, 초기에는 이러한 ㄱ자형 구들은 북쪽지역에서 발달하였고, 이보다 기후조건이 온화한 남쪽지역에서는 단순한 신석기시대의 화덕형식이 쓰였으며, 그 후 점차 남쪽으로 전파되면서 기후조건상 중부지역에서는 ㅡ자형 구들이 나타나기도 하며, 이러한 ㄱ자형 구들이 한반도 남단까지 완전히 전파되게 되는 시기는 대략 고려시대초기(11C이전)로 판단됩니다.

ㄱ자형 구들은 초기에 북쪽의 하류계층에 의해 주로 쓰였으며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반면, 상류계층은 아직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후기에 들어 점차 상류계층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방 전체 구들시대(A.D.11C 이후)
역사적 시기로는 고려중기(11C) 이후가 되어서야 아궁이가 방 밖으로 나가고 이와 함께 방 전체에 구들이 놓이는 온돌방의 형식이 정착되어 본격적인 좌식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이미 이 시기에 도배까지한 온돌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 전체 구들이 되는 것도 북쪽에서 먼저 시작되어 남쪽으로 전해진 것으로 판단되며, 고려 말에는 남쪽지역까지 완전히 전파되었고, 특히 제주지역은 9C이후에 들어 주로 상류계층의 관리들에 의해 전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사용계층이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그 주도 계층이 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남쪽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주로 상류계층의 관리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사실과, 온돌이 방 전체로 되면서 건조 및 유지,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그 주도계층이 주로 여유가 있는 상류계층이었다는 사실로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돌의 발생은 하류계층인 북방의 고려 서민 사이에서 만들어졌던 ㄱ자형 구들 혹은 장갱이었다고 하나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들어 방 전체로 온돌이 되면서는 상류계층이 그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유적으로 볼 때 초기에는 골폭이 좁고 고래의 둑폭이 넓으며 방전체가 4줄 고래 정도로
간소하다가 후기에는 점차 고래의 줄수가 늘어나고 골폭이 넓어지고 둑폭이 좁아져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들어 다양한 고래의 평면유형과 지역별 구조적
차이점이 나타나게 되며, 특이한 구조의 온돌방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고구려 철제 부뚜막 운산 용호동 1호분

 

 

 

        

 


따스한 구들장의 추억 온돌

온돌은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법으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화기(火氣)가 방밑을 지나 방바닥 전체를 덥게 하는 장치이다. 모든 민가에 사용되었는데, 온돌의 채난원리(採暖原理)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것이다. 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구들장)에 화기를 도입시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하는 것을 말한다.<편집자 주>

10월에 접어들면 가을의 깊이는 속도를 더한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던 여름밤은 온데간데없고, 목덜미에 스치는 바람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첫서리라도 맞으면, 방안 깊숙이 잦아든 찬기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서서히 녹아든다.

우리나라의 온돌은 사실 치밀하게 계산된 난방법이 아니다. 오랜 경험과 생활에서 취득한 특유의 과학적인 사고의 단면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주 생활 전반을 지배하면서 주거문화를 형성하는 기틀이 되었으며, 그 생명력은 오늘날에도 퇴색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 화기가 방 밑을 지나 방바닥 전체를 데우는 난방장치로 오랜  전통을 지닌 난방법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거의 모든 민가에 사용되었다.

채난원리(採暖原理)는 열전도를 이용한 것으로, 방바닥 밑에 깔린 구들장에 화기를 넣어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하는 방식이다. 한 민족의 생활양식이나 문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온돌의 탄생 또한 예외가 아닌 듯싶다.

오랜 경험과 착오를 거친 산물

온돌에 관한 최초 기록은 513년에 저술된 중국 문헌 ‘수경주(水經注)’에서 발견된다. 우리나
라의 경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7세기 중엽 이전의 고구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돌을 놓고 살았다고 추측된다.

한옥은 구들과 마루로 구성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였다고 한다. 그 이전의 주된 생활공간은 오늘날 대청과 같은 마루방이었다고 전해진다.

온돌을 이야기할 때 부뚜막을 빼놓을 수 없다. 온돌은 사실 부뚜막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부뚜막에서 온돌이 탄생하기까지의 단계를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갱(坑)을 파고 부뚜막의 열기를 그곳으로 통과시켜 실내를 덥혔다.

아마 부뚜막 열기를 실내까지 끌어들이기까지는 무수한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다. 온돌은 바로 그런 실험과 실패 끝에 얻어진 한국인의 노작(努作)인 셈이다.

구들의 작용원리

- 구들의 원리를 직접 불을 지핀다는 가정 하에 살펴보자. 땔감이 타면 아궁이에 공기는 가열된다. 이 열기는 연기와 함께 아궁이 후렁이 위쪽으로 빠르게 상승하게 된다.


즉, 뜨거운 공기는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는 하강하는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로  데워진 열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구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열기는 부넹기의 좁은 통로를 지난다. 이때 열기의 이동 속력이 빨라지면서 부넹기에서 의 열기 압력은 낮아진다. 이는 과학의 원리와 맥을 같이 한다.

즉 공기나 액체와 같은 유체는 지나가는 길이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속력이 빨라지고 압력은 낮아진다. 따라서 부뚜막보다 부넹기에서 압력이 낮기 때문에 부넹기는 열기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빨아들여 구들개자리로 넘겨주는 역할을 한다.

- 구들개자리에서는 열기가 부뚜막에서 부넹기로 이동할 때와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부넹기의 좁은 통로에서 구들개자리의 넓은 통로로 열기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즉 구들개자리에서 열기의 속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천천히 소용돌이와 같은 흐름(와류)이 생기면서 속도가 조절된다.

일시에 고래 쪽으로 열기가 이동되지 않고 구들개자리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들개자리는 열기가 저장하는 창고역할을 하는 셈이다.  

- 구들장 바로 아래를 지나는 위 부분의 열기는 구들장을 데우면서 여러 갈래의 고래로 진입한다. 그리고 구들개자리로 들어간 열기는 와류로 인해 그곳에 있던 차가운 공기와 열을 교환하게 된다. 이처럼 열기는 여러 개의 고래로 분배되어 들어가 방 전체를 고루 따뜻하게 해준다.

- 고래로 들어간 열기는 다시 고래 머리 부분의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 열기의 이동 속력이 줄어든다. 이곳의 열기 중 온도가 가장 높은 공기가 위로 올라가 구들장 바로 아래로 서서히 흘러가면서 구들장을 가열한다. 이로 인해 공기는 점점 냉각돼 결국 고래 바닥으로 내려오고 일부는 고래개자리로 흘러간다.

- 한편 냉각된 공기가 점점 고래 바닥으로 흘러 구들개자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뜨거운 고래개자리 부위와 만나 데워지고 다시 구들장 쪽으로 상승하게 된다. 고래에서 전체적으로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대류현상은 아궁이 쪽이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고래의 모양에 기인한다. 고래 꼬리 쪽으로 갈수록 냉각되는 공기는 고래 바닥으로 흘러 내려가면서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점점 낮아지는 고래의 머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 좁은 꼬리 부분의 고래를 통과해 넓은 공간의 고래개자리로 넘어간 공기는 또 다시 이동속력이 줄어든다. 여기서 여러 개의 각 고래에서 나오는 다른 온도의 공기가 한데 모여 고루 섞인다.

동시에 온도의 고저에 따라 공기는 위아래로 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 남아있던 열기가 고래개자리 위 부분의 구들장을 가열하면서 서서히 실외 굴뚝개자리로 흘러가서 굴뚝을 통해 대기로 방출되는 것이다.

구들 황토방-별채 만들기  

 



 난방 연료가 장작이었던 지난 날 구들방은 일반적인 난방 형태였다. 시대가 변하여 단독주택보다는 연립주택이나 아파트가 일반적인 주거 양식이 되고 난방 형태가 기름이나 가스, 전기로 바뀌면서 구들방은 우리 살림집(흙집)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어 갔다.
 현대병으로 일컬어지는 많은 병들이 주거양식과 음식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현대인들이 황토집이나 황토 구들방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시골에 내려와 전원주택을 짓고 살려는 사람들이나 시골에 있는 분들도 작게나마 구들방 한 칸을 들였으면 하는 바램은 크지만 어찌할 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규모가 작기에 선 듯 시공에 나서주는 업체도 드물다. 주변에서 구들을 놓아보신 어른들은 이미 귀한 존재가 되었다. 조금은 까다롭지만 내 손으로 직접 지어 볼 수는 없을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내 손으로 짓는 황토 구들방 전체 시공법을 개략적으로 알아본다.

1. 규모를 정한다


 본 채가 지어진 터의 한 가장자리 여유로운 곳에 터를 정한다. 보통 구들방 한 칸은 9자×12자 방이다. 약 3평 정도이다. 조금 작은 느낌이 들 경우 3.5×4m 정도(약 4.2평)로 하면 된다. (욕심을 내어 구들방과 결합한 툇마루를 놓을 경우 그 폭을 2m 이상으로 하여야 쓰임새가 있다)

2. 기초공사

 거푸집을 대고 콘크리트 줄 기초를 하면 좋겠으나, 직영 공사일 경우 건물 외곽선을 폭 60cm, 깊이 60cm 정도로 파서 잔돌로 잡석다짐을 하고 그 위에 버림 콘크리트를 약 30cm(레미콘 3㎥정도)친다. 그 위로 약 80-90cm 정도 높이로 건물 테두리기초를 만든다. 하단부 30cm(흙으로 되메우기 되는 부분)는 일반 시멘트 벽돌로 기초 하단부를 잡고 그 위 약 50-60cm는 바깥쪽으로 치장벽돌 1장, 안쪽으로 시멘트벽돌 3장 쌓기(폭 40cm정도)를 한다. 다른 방법으론 주변의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돌담 쌓기처럼 폭 40cm로 쌓아 올리는 방법도 있다. 이때는 진흙과 시멘트 몰탈로 돌 사이를 잘 메꾸어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기초공사시 아궁이 위치와 굴뚝 위치는 미리 규격을 정해 구멍을 뚫어 놓아야 한다.  

3. 집 모양 갖추기 - 뼈대, 지붕, 그리고 벽체 공사

 규모가 작으므로 굳이 비용이 많이 드는 한옥 방식의 목 구조로 집의 뼈대를 자지 않아도 된다. 기초 위에 구들방 방박닥 높이를 계산하여 그 위로부터 흙벽돌을 쌓아 올려 집의 벽체를 구성하면 되는데 이 때 코너 기둥의 위치는 흙벽돌과 이어 치장벽돌로 기둥처럼 만드는 것이 좋다. 치장벽돌 약 400장, 흙벽돌 300×200×140 규격 250장 정도가 필요하다. 치장벽돌 기둥 위에 처마 도리 기능을 하도록 사각 6치(약 18cm)정도의 목재를 사방 고정하고 용마루 지붕선을 만든 후 지붕을 만들면 된다.
  맛배(박공) 지붕 형태로 용마루 선을 목재로 만든 다음 2×4 각재나 주변에서 벌목한 약 10-12cm 정도의 소나무나 잣나무, 낙엽송을 다듬어 서까래로 사용하면 된다. 서까래의 간격은 30cm(한 자) 간격으로 하면 짜임새가 있다. 보통 40cm 정도로 하여도 된다.
  처마 쪽에는 미송합판으로 마감하고, 집의 내부 천장에는 80-100mm 스치로폼을 서까래 위에 얹는다. 스치로폼 사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목재로 상을 걸어준다. 그 위로 각재(현장에서는 다루끼라고 한다)를 30cm 처마 끝과 용마루 선에 맞추어 덧집 형태로 지붕 모양을 최종 완성한다.
  그 위에 OSB 방수합판이나 일반 합판을 깔고, 아스팔트 슁글 판매상에서 방수시트와 슁글을 사다가 깔면 된다. 접착 면을 잘 이어 붙이고 슁글은 못으로 잘 고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금속 기와나 한식 기와, 너와로도 지붕을 마감할 수 있다.  

4. 창과 문 공사

 창과 문은 의뢰하는 것이 좋다. 창은 외부에는 샷시(우드샷시나 알루미늄샷시)창으로, 내부는 목 창으로 하는 것이 좋으며, 툇마루와 연결되었을 경우 4짝 분합 문으로 통행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문틀과 흙벽 이음매 고정을 위해 흙벽돌 조적시 가창틀(또는 인방)을 넣는 것이 필요하다.  

5. 구들방 공사

 기초 공사시 테투리 옹벽(돌기초 포함)의 폭을 40cm로 한 것은 벽체 두께를 약 30cm(흙벽돌 대자와 소자로 2장 쌓기를 하든, 흙벽돌을 세로로 하여 30cm로 하든)로 하고, 10cm는 구들을 얹을 수 있도록 함이다.

(1) 자재 준비
 3.5m×4m 크기의 구들방(약 4.2평)을 기준으로 보면 45-55cm 크기의 구들장 약 60장, 잔 돌, 시멘트 벽돌이나 적벽돌 1800-2000장, 시멘트, 모래, 진흙(황토 몰탈이면 좋다), 굴뚝 자재(토관 또는 스덴주름관+치장벽돌)

(2) 아궁이와 부냉기  
  가마솥을 놓을 것인가, 아궁이만 할 것인가에 따라 아궁이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아궁이 입구는 가로 25cm정도, 높이 35-40cm정도가 적당하다. 아궁이에서 불이 넘는 부냉기는 가로 30cm, 세로 20cm 정도로 턱을 주어야 한다.

(3) 고래 개자리, 구새(굴뚝)자리
  고래 개자리란 방 윗목 고래 끝부분을 말한다. 폭 30cm,  깊이 45-50cm 정도로 윗목 개자리보다 낮추어 적벽돌로 쌓는다. 굴뚝 내경은 폭 30cm, 깊이 15cm정도로 하여 고래 개자리와 잇닿아 만들며 고래 개자리에서 굴뚝으로 넘어가는 턱을 주어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 나가지 않도록 시공한다.

(4) 고래
  불길을 내고 구들장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을 고래라 한다. 아궁이에서 고래 개자리까지의 경사도는 5-8도를 유지한다. 시공하기 까다롭지 않은 곧은 고래 방식으로 한다. 고래의 뚝 높이는 약 25cm 정도로 하며, 고래 뚝 폭은 약 20cm(벽돌 2장 폭)로 한다. 고래와 고래 간격은 구들장 크기를 고려하여 약 30-35cm 정도로 하면 된다. 아랫목에서 고래 개자리가지의 블록은 7-8개 정도로 한다. 방 가운데는 깊게 가장 자리는 낮게 하여 열 전달이 고루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고래는 평평한 돌을 진흙과 시멘트 몰탈로 이겨 쌓을 수도 있고, 시멘트 벽돌이나 적벽돌로 쌓아도 된다. 내화 벽돌을 구하여 쓰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다.

(5) 구들 깔기
  고래 위에 구들을 얹는다. 아랫목에는 두꺼운 구들을 놓고 윗목에는 얇은 구들을 깔아 열 전도가 골고루 될 수 있어야 한다. 구들장은 잔 돌을 고여 고정하고 구들장과 구들장 사이에는 잔돌로 새침을 막는다. 구들장과 구들장 사이의 이음매를 된 반죽으로 뭉친 진흙을 내리쳐 세게 새침한다. 아랫목이 깊고 윗목이 약간 높도록 구들을 놓는다.    
    
(6) 황토몰탈 마감하기
  일반 기름 보일러등 이중 난방을 할 경우 구들장 위에 반죽하지 않은 황토를 갈고 잘 다진 후 와이어 매쉬를 깔고 배관한다. 엑셀 파이프 배관으로 하지말고 스덴 파이프 주름관으로 배관(엑셀파이프가 구들 난방으로 녹을 수 있기 때문에)한다. 황토 흙을 채로 쳐서 고운 황토로 만들고 모래와 혼합하여 초벌을 바른다. 물기가 빠지면 미장 칼로 중벌 바르기를 하면서 2-3번 누름 칼질을 한다. 그 후 약 4-5시간 경과 후 얇게 마감 미장을 하여도 되고, 중벌 미장 후 시간을 두고 마감 손질만 하여도 된다. 자재를 시중에서 판매하는 황토 몰탈로 시공하면 큰 하자는 없다. 약간 경사진 구들방 위에 수평을 맞추어 아랫목은 약간 두껍게 바르고 윗목은 얇게 발라 전체적으로 따듯하도록 고려한다. 황토 미장의 두께는 3-4cm 정도로 한다.  

(7) 구새(굴뚝), 불 맞이 돌  
   구새의 내경은 사방 15cm 정도가 적당하다. 스덴 주름관으로 연통을 만들고 외부를 치장벽돌 조적 굴뚝으로 모양을 내서 쌓아도 되고, 주변의 돌과 황토, 시멘몰탈로 이겨 구새를 만들어도 좋다. 길고 좁은 항아리밑을 깨어내고 이어서 구새를 만들기도 한다. 높이는 지붕 용마루선 보다 약간 높게 하여야 바람이 내지 않고 연기를 잘 빤다.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구새 갓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 고래 개자리와 연결된 구새 하단부의 뒤쪽으로 불 맞이 돌을 넣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 개자리 바닥에서 약 18cm 높이에 12×20cm 정도의 돌을 끼어 넣어 구새 청소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8) 내장 마감 창, 문 설치
 벽체와 구들가지 완성되면 천장은 석고보드 마감한다. 30cm 간격으로 목재로 상을 걸고 이음매를 본드로 칠한 후 석고보드를 타카 못으로 고정한다. 서까래 노출로 하고자 할 때는 지붕 공사시 천장 하단부에 미송합판이나 루바로 마감해 두어야 하며 서까래 사이의 공간을 막는 단골메기를 잘 해 주어야 한다. 창과 문을 설치한다.  

(9) 도배 및 장판 마감
  약하게 불을 지펴 연기로 말린다. 건조된 상태에서 황토미장이 갈라지면 고운 분말을 내어 이긴 황토로 메운다. 병이나 사발로 밀어 넣는다. 상태를 지켜본 후 충분히 건조되었다고 판단하면 도배 후 장판 마감을 한다. 바닥 면을 깨끗이 청소한 후 초배지를 밀착시켜 바른다. 꼭 꼭 눌러준 후 초배지가 마른 상태에서 초배지의 끝만 풀칠하여 이어 붙인다. 그 위에 한지 종이를 끝만 풀칠하여 같은 방식으로 마감한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콩기름 한지장판은 물에 하루 동안 담아둔 후 펴서 시공한다.

(10) 콩 땜
  재래적인 방법으로는 메주콩을 갈아 들기름과 섞은 후 기저귀 천 등에 담아 사발이나 병으로 밀어 콩 땜을 먹인다. 3-4차례 해 주어야 면이 곱다. 편리한 방법은 100% 콩기름 식용유를 끓인 후 식혀 붓으로 칠하는 방법도 있다. 콩기름 종이장판 시공 시 별도의 콩 땜은 하지 않는다. 살면서 콩기름 식용유를 끓여 붓으로 칠해주면서 보양하면 오래 간다.  

 

수천년 지혜가 만들어낸 한옥의 난방시설

한옥의 살림집 난방은 아궁이에 지핀 불길이 고래(구들장 밑으로 낸 고랑)를 타고 구들장을 데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안방의 경우에는 부뚜막이 있다.
가마솥을 건 부뚜막에는 큼직한 아궁이가 있어서 장작을 듬뿍 집어넣고 불을 때도 좋을 만큼 넉넉하다. 아궁이 바닥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해서 높이고는 고래가 시작하는 부분에 ‘부넘기’라는 턱을 만들어 준다.

장작에 불이 붙으면 불과 연기가 이 ‘부넘기’로 해서 고개를 바짝 쳐들게 되고, 그래서 깊은 고래 위에 얹은 구들장을 핥으며 지나갈 수 있게 된다.

고래로 그냥 통과하면 방이 데워지지 않고 아까운 열량만 소비할 뿐인 것이다.  고래로 통과하는 불길과 더운 공기가 구들장에 달라붙게 마련하는 일이 한옥 난방시설의 요체이다.

고래는 30 ㎝ 정도의 높이로 골을 이루듯이 만들어진다. 여러 개의 골이 평행하기도 하고, 아궁이로부터 방사선형으로 고래를 켜기도 한다. 켠다는 말은 고래를 같은 간격으로 이랑 이루듯이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고래 주변에는 고래보다 더 깊은 개자리(방구들 윗목에 깊이 파놓은 고랑)가 생긴다. 개자리는 50 ㎝ 이상 깊어서 고래보다 바닥이 차다. 불담에 휩싸여 따라들어오던 그을음과 티끌들이 이 개자리에 떨어진다.

개자리에 머물던 더운 기운이 비로소 굴뚝으로 향하게 되는데, 개자리는 아궁이에서 데워진 더운 공기와 불길이 구들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만든 것이어서 더운 공기가 굴뚝으로 직행하려는 동작을 제어하는 에어커튼의 구실을 한다.

한옥의 구들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소각로가 된 것은 이 개자리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수천년 불을 지펴온 사람들의 지혜에서 우러나온 결과이다. 방에 구들을 들인 예가 세계 어느 민족에도 없다는 사실은 신식의 소각로보다 우리 풍부한 경험의 소산인 개자리가 월등한 효능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개자리에서 머물던 더운 기운은 티끌을 다 떨어버리고 맑은 연기만 배출한다. 땅바닥에 연무로 퍼지는 파아란 연기는 한옥의 한 정취이기도 하고 살충제의 구실도 한다.

굴뚝의 연기는 천연 방충제 기능

사랑방은 굴뚝을 방문 앞 마당에 설치하기도 한다. 키작은 앉은뱅이 굴뚝인데 아주 정감어린 구조물이어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 앉은뱅이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모깃불을 따로 지피지 않아도 그 연기로 해서 벌써 모기는 저만큼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굴뚝 언저리에는 거미줄이 없다.   줄을 치고 벌레를 잡아먹어야 하는데 연기에 쫓겨 벌레들이 다 피해가 버려서 거미로서는 헛수고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굴뚝의 연기는 자연스레 방충기능을 지니고 있다. 고향 한옥에 사는 이들이 발달된 의료기관이 없던 시절에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궁이와 굴뚝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거듭해 살균해 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소나무를 때면 소나무 그을음이 가마솥이나 아궁이 구들장에 묻는다. 그것을 긁어내면 먹을 만들 수 있는데, 그 먹으로 글씨를 쓴 자리는 잘 썩지 않는다.  먹에 방부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금성을 돌아보면 굴뚝 보기가 어렵다.

일본의 살림집에는 굴뚝이 아온 없다. 화덕 말고는 불을 때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옥은 집집마다, 건물마다 굴뚝이 있다. 그런 굴뚝은 굴뚝조형에 특별한 재주를 부려서 경복궁에 보물로 지정된 굴뚝이 있을 정도이다. 전세계에서 굴뚝을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민족은 단지 우리뿐이다.

불이 인류의 문명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우리 구들은 놀라운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 : 신영훈 (해라시아문화연구소장. 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한옥문화원’을 개원, 한옥을 체계적으로 연구)
사진 : 김대벽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췌 : sulloc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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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성어 중에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은 풍족하고 유쾌한 삶의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배불리 먹는 것을 들었다.

물론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겠지만, 우리 민족은 여기에다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시켰다. 등까지 따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포고복이라는 말 대신에 이런 말을 만들어 즐겨 사용해 왔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정승 부러울 게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등을 따습게 할 수 있었던가. 여기에 바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주거 양식, 난방 장치인 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 겨울에 우리 한국인은 불이 잘 든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누워야만 비로소 제대로 잠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들(장)지다’는 ‘잠자다’ 또는 ‘눕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고, 이래저래 한국인들은 모두가 ‘구들장 지기’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사용됐나

함경북도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지만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문헌 기록으로는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게 가장 오래다.

이 책 고구려 항에 나오는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援)”는 구절로 보아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어 4-5세기에 활발해진 북방계 민족의 남하운동에 따라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에 점차 남쪽 지역에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조선 초기에 들어와 북부 및 중부 지방은 물론 남부지방까지 구들을 이용한 가옥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구들이 우리 민족 고유의 가옥 난방 장치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구조와 모양이 있는가

구들은 ‘방구들’의 줄임말로 ‘온돌’이라고도 한다.  그림에서 보듯 구들은 크게 세 부분, 즉 아궁이·고래(불길)·구들장 그리고 여기에 개자리·연도·굴뚝 등을 추가하여 이루어진다. 구들장 위는 흙을 덮어서 방바닥 또는 마루를 이루게 하는데 따라서 구들은 불지핌에서부터 불의 이동 및 불의 보관까지를 겸한 아주 다양한 용도와 목적의 연소 및 난방 시설이다.

아궁이에서 굴뚝 연도까지 도랑 모양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곳을 구들고래 또는 방고래라 하며 구들장을 받치는 것을 두득이라 한다.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낸 고래를 특히 개자리라 하는데 이것은 역풍을 방지하기 위해 판 도랑으로 구들고래가 끝나는 주위의 벽과 고막이 안에 깊게 만든 고래로써 대개 불아궁이의 반대편 벽쪽에 만든다.

이 외에도 불기운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저장됨으로써 보온 기능을 극대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굴뚝 바로 밑의 개자리로 연기가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고래에는 구들장을 놓는 방법에 따라 줄고래(나란히 고래), 부채 고래(선자 고래), 맞선 고래, 허튼 고래, 굽은 고래 등이 있다(그림 참조).

한국인과 함께 존재할 구들

구들을 이용한 난방법은 주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을 이용하는 것으로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 등을 모두 이용한 난방법이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주로 열의 전도에만 의존하는 난방법이기 때문에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가 심하고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을 밀폐시켜야 하며 연료 조달이나 온도 조절이 어렵다는 것 등 여러 단점으로 인해 요즘 짓는 가옥에서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방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배 깔고 등을 대야 진정으로 따듯하고 즐겁고 배부를 수 있던 한국인, 추운 겨울 밖에서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이 따스한 아랫목 구들에 손을 넣던 한국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구들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엉덩이며 손이며 등짝 살갖에 ‘쩍’하고 달라붙던, 화들짝 불에 데인 진한 입맞춤과도 같던 방구들 장판의 그 맛과 멋을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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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찬바람이 속살을 파고들 즈음이면 군불로 데워진 뜨끈한 온돌방이 제격이다. 겨울비라도 내려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면 온돌의 아랫목은 더 없는 극락이다.

그렇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생활도 쉬운 것은 아니다. 장작불을 때는 부엌은 그을음이 부뚜막으로,벽으로 갈수록 더해간다.게다가 연기란 놈이 집안 구석구석 숨었다 가기 때문에 아무리 옷을 잘 빨아 넣어두어도 갈아입을라치면 언제나 ‘시골냄새’라는 불내(불냄새)가 ‘군군’하게 풍겨나니 말이다.

지금처럼 석유나 가스,페치카의 불도 좋지만,그래도 장작불만은 덜하다. ‘ 구운 돌 위에 사는 즐거움’이란 곧 자연의 정을 체감하는 사람 사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나이든 세대들은 이 온돌방의 추억을 지금도 따습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민족의 정서가 세계에 유례없는 온돌문화를 만들어 냈다.

●전설의 온돌방

최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무른 절로 유명한 경기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사적 제128호)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이 원형에 가깝게 발굴됐다.

공동조사단 장경호 단장은 “온돌시설이 확인된 건물지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작성한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건물배치로 볼 때 ‘서승당(西僧堂)’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온돌시설은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ㅌ자 형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구들이 깔려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때면 연도(煙道,연기길)를 따라 방의 구들을 덥힌 뒤 일(一)자로 뻗은 중앙 통로 바닥을 거쳐 건물 뒤쪽에 설치된 굴뚝으로 연기를 배출하는 보온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회암사의 온돌은 경남 하동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과 유사한 구조로 확인됐다.아자방의 경우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세운 것으로 “한번 불지피면 온기가 마흔 아홉 날을 갔다”는 전설의 온돌방이다.그러고 보면 회암사도 실용·효과면에서 칠불사 아자방 못지 않았을 것 같다.

옛 건물의 구들은 자연의 힘과 불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완벽하게 방습 처리하고,바람 세기,굴뚝의 위치나 높이,방향 등 지역 조건을 잘 맞추었을 것이다. 그래야 온기가 오래갔을 테니.  결국 구들은 우리 민족이 불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가를 웅변하는 문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들의 구조는 간단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들장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뜨거운 열기가‘(구들)고래’라 불리는 공간을 지나면서 달구어진다. 식은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아궁이와 고래 사이엔 ‘부넘기’가 있다.

불이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넘기와 고래, 고래와 굴뚝 사이엔 각각 연기의 역류를 막는  ‘구들개자리’ 와  ‘고래개자리’ 가 있다. 우리의 구들은 허공을 돌로 가두어 열기와 연기가 순환하도록 한, 단순하지만은 않은 문화였다.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온돌’ 은 한자 표현이다. 구들은 중국 문헌 ‘진서’서이전에 따르면 기원전 300 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당서’ 고구려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길다란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이 갱이 바로 구들의 원형으로 보인다.

●부지런한 자가 먼저 온돌에 앉는다.

온돌(구들)문화는 글자 그대로 돌을 달굴 정도로 자연과 붙임이 많아야 살아 갈 수 있는 문화이다. 우리 정서를 이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의 부지런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어서다.

구들을 데우려면 땔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기실 방 몇 개 데우려면 그야말로 장작패는 일이 쉽지 않다. 가끔 옹이가 있는 솔둥걸이 라도 만나면 기진맥진해서야 끝이 난다.

불 때는 것도 처음에는 밑불로 솔가지와 솔방울 몇 개를 놓고 잔불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처음에는 으레 연기가 구들로 들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곤혹스럽다.

그래서 인생처럼 불도 조심스레 달래는 요령이 필요하다.

여하간 구들은 구들장 베고 누워 여유부리는 게으른 자들에게는 커다란 애물일 수도 있으니, 요사이 난방보일러는 그들에게 구세주일 게다.

지난 주 추위는 강풍을 동반했다. 이곳 서당아이들 가운데 집이 먼 녀석들은 추위를 녹인다며 군불더미에 조약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는 물음에  “그냥요” 라고 답하는 아이들을 보니 거북이가 알 깨고 나와 제 어미에게 배우지 않아도 하는 수영처럼,  느낌으로도 조상의 삶을 잘도 꿰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꽁꽁 얼어붙은 시골저녁, 오늘은 정말 군불 지핀 구운 돌(온돌)위에 등을 붙이고 누우니, 수 천년 이어진 선조 들의 삶이 따끈따끈한 온돌로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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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따습고 배 부르니 ~을 한다' 는 말이 있다. 사람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등 따습고 배부른 기초 욕구가 충족되고 나서 다음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등 따스우면 배 부르다' 는 속담도 있다. 추운 날 설설 끓는 방에 누워 있으면 배고픈지조차 모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따스함은 먹는 것보다 더 원초적인 욕구다.

신라 선덕여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땔 나무와 양식을 골고루 나눠주는 덕을 쌓아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다. 땔나무는 음식을 끓이고 몸을 덥힐 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는 불을 만든다.  그 땔나무의 불과 돌이 만나 움집의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아파트 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고 있는 것이 온돌이다.

온돌을 덥히는 땔나무는 산업화에 따라 연탄으로, 경유로, 도시가스로 달라졌지만 방바닥을 덥히는 온돌의 온기는 여전하다.  40 대 이상 세대들은 아궁이와 부뚜막, 아랫목이 까맣게 달아오른 온돌방의 추억을 지금도 따습게 간직하고 있다.

찬 봄비가 주룩주룩 내려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면 그때로 돌아가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아랫목에서 등도 '지지고' 싶다. 이런 민족의 정서가 세계에 유례없이 아파트에 온돌방.거실을 설치했는가 하면 온돌 침대를 낳고 도심의 찜질방이 성황을 이루게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짚으로 지붕을 잇고, 겨울에 긴 구들을 만들어 따뜻하게 하였다' 고 당나라 역사서 '신당서(新唐書) ' 는 적고 있다. 당나라에는 없는 고구려만의 특색이었던 것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발굴된 땅을 깊이 파내려간 움집 한가운데에도 불을 지피는 노(爐) 가 갖춰져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은 난방.취사.조명 기능을 했던 이 노가 가옥의 구조 변화와 함께 온돌로 발전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복합 기능을 가진 노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난방을 위한 방 가운데의 노와 취사를 위한 구석의 부뚜막으로 나뉘게 되고 다시 노와 부뚜막이 합쳐 아궁이.구들.굴뚝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온돌형태로 발전했다" 고 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말한다.

삼국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께부터 우리는 온돌에 등을 덥히며 살아온 것이다.

온돌 구조는 크게 불을 때는 아궁이, 불길과 연기가 지나가는 고래, 고래를 덮는 구들장과 굴뚝으로 나뉜다. 이런 온돌에도 수천년 동안 궁리하고 발전시켜온 조상들의 지혜가 구석구석 배어 있다는 것이 김남응(단국대 건축공학) 교수의 설명이다.

"아궁이와 고래 사이로 불이 넘어가는 부넘기 혹은 불고개라는 턱을 둔 것은 열기와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며 고래 속으로 잘 들어가게 하며 다시 고래가 끝나는 곳을 우묵하게 낯춘 개자리는 열을 마지막까지 활용하면서 굴뚝 등을 타고 들어온 빗물의 역류도 막아낸다" 고 김교수는 설명한다.

불길을 많이 받는 아랫목은 두꺼운 구들장, 윗목은 좀더 얇은 구들장을 얹고 그 위에 황토 등의 흙을 바른 것이 온돌방이다. 불을 때어 구들을 덥히는 전통 아궁이는 산업화와 함께 도시에서 연탄 아궁이로, 다시 보일러로 바뀌었다.

고래도 이제 불길이 아니라 뜨거운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나 전기 열선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온돌의 전통을 악착같이 계승해 등을 따습게 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우리의 인사는 등 따습게 잘 주무셨냐는 말입니다. 온기가 있는 것을 우리는 생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등골이 식었다고 하지않습니까. 방에 누워 따스한 온기를 받으며 우리는 살아있음을 편안하게 느낍니다. 불과 돌과 흙이 어우러져 순환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온돌입니다."

돌 문화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윤재근(한양대 국문학) 교수는 나무와 불과 돌과 흙이 순환하며 빚어내는 온기, 태초의 생명이 온돌이고 우리는 거기에 누워 매양 편안하게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곧 불이면서도 어머니 양수 속 같은 재생의 공간이 온돌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비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무스름한 운모류의 판석은 열에 강하고 열전도율도 낮아 오랫동안 열을 머금을 수 있어 구들장으로 많이 쓰인다. 이 판석이 열을 받으면 원적외선이 많이 발생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따스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기에 바닥난방인 온돌은 스팀난방 등에 비해 아래로부터 위까지 따스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난방법이다.

이런 온돌난방을 현대화.세계화하기 위해 1996년에 구들학회(회장 최영택) 가 창립됐다. 건축.열 역학.문화 관련 교수와 온돌개량 사업가 등 3백여명의 회원을 가진 이 학회는 한해 두차례 세미나 등을 개최, 우리 민족 문화와 생명의 뿌리인 온돌을 탐구하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평생을 온돌 현대화를 위해 힘써온 최영택 회장은 "독일.프랑스.일본 등에서는 바닥난방이 과학적이며 에너지 절약에도 도움이 돼 공업회 등을 결성하고 있는데 정작 종주국인 우리는 등한시하고 있다" 며 사라져가는 구들 명장들을 한시바삐 인간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요망했다.

"온돌은 우리 민족 생명의 그릇이며 문화의 바탕" 이라는 김남응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따스한 온돌에서 생명의 위안을 얻는다. 그 따스함이 현대의 스트레스를 불끈 땀으로 밀어내며 또다시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한 번의 난방으로 100일이 따뜻해지는 아자방

 

 


칠불사는 쌍계사 북쪽 20리에 있다.
화개 10경중의 하나인 칠불사는 반야봉의 남쪽 800M고지에 있는 절로 우리나라의 최고 오래된 사찰,운상원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이곳은 오랜역사와 전설,남겨진 문화유산과 유적이외에도 아름다운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1655년 화개동을 찾은 김지백선생은 지리산 370여 사찰중에서 칠불암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였다. 칠불사는 남쪽만이 툭 터져있는데 그 곳으로 보이는 화개장터와 그 건너의 굽어보이는 백운산은 그야말로 선경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표현한 서산대사의 제자인 정관일선(1533-1608)선사의 시가 있다.

    두류산 반야봉 동쪽에 절이 있는데
    달빛이 금당을 밝혀 그림자 영롱해라
    향불 꺼지자 아지랑이가 탑 끝에 날고
    종소리가 꿈 깨며 늦바람에 들려오네.

    청학은 청학동에 오지 않는데
    백운(白雲)은 항상 백운산을 감싸고 있네
    쌍계사 멀리 보이는 석문(石門)사이로
    희미한 가을빛이 한 눈에 보이네


문화 역사적 의의(아자방)

 칠불사는 948년 여순 반란사건의 공비토벌 때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주지 통관 만충성의 각고의 노력과 불교를 사랑하는 많은 신도의 성원으로 재건되었다.

칠불사에는 담공선사가 축조한 아자방이 벽안당에 있다.

아자방은 넓이가 8㎡이고 방안의 네구석70cm 높은 좌선처이며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경행처인데『칠불선원 사적기』에는 신라 6대 지마왕 8년(119)에 소축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산대사가 정진하였고 조선 순조 28년(1828) 대은대사가 율종을 수립하였습니다. 아자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무익공계 건물입니다.정면 우측 2칸이 부엌으로 되어있고, 좌측 3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내부는 각각 틔어져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습니다. 온돌방의 내부는 바닥 높이가 다른 2단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중 각 좌우 1칸은 중앙칸보다 45cm가량 높고 경계면이 『아자형』으로 가운데가 파여진 모양을 하고 있어서 온돌방 바닥의 전체 모양이 아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아자방은 겉보기에는 보통 건물 같지만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방의 내부구조가 아(亞)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아자내부는 낮고 아자외부는 높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아자외부의 높은 부분은 스님이 좌정하여 수도하는 곳이며 아자 내부의 낮은 부분은 수도중 몸을 풀기 위하여 걷는데 사용하는 장소입니다.

즉 수도와 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마련된 방인 것이다.

 


아자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때 담공선사가 이 곳 칠불사 벽안당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그 방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하였습니다. 이 온돌은 한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49일 동안 따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8년 12월 15일 여순 반란 사건 반도 토벌 작전 때 마산 주둔 17연대 하동 파견 부대가 소각 전소시켜 아자방은 온돌만 남아 있었는데 통광 스님의 노력으로 1982년 현재의 건물이 복원되었습니다


 

경남 칠불사아자방지 아자방의 굴뚝 아자방이 있는 건물

온돌의 열효율 특성



崔 瑞 國





1. 서 언


千餘年前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온돌을 발명하여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무렵 日本에서는 ‘이로리’라 하여 방바닥 한복판에 4각형으로 爐를 깊이 파고 나뭇가지를 때서 採暖했으매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대개 방안에서 직접 장작불을 피워 추위를 모면했던 것 같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온돌은 상당히 문화수준이 높은 暖房方式이었으며 난방과 동시에 炊事도 겸할 수 있었고 소여물 같은 것도 끓여줄 수 있었으며, 재는 肥料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땔감은 솔가지, 섶나무, 나무뿌리, 낙엽, 잡초 등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이 옛날의 온돌은 합리적이고 선진적이며 에너지 걱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좋은 난방방식이 세계 각국에서 발달되고 있으며, 熱效率이 온돌보다 갑절이나 높은 난방장치도 많다. 그러므로 온돌을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다.

아직 난방이라 하면 온돌 이외에는 생각조차 안하고 高層 아파트 꼭대기까지 연탄 온돌을 올려놓고 있는 우리의 실정인 바, 과연 온돌은 오늘날에 와서도 비판의 여지없이 만족스럽기만 한 것일까?

여기서는 주로 열효율 면에서 온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열효율 특성이라 제목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아직 온돌의 표준 설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고, 性能 試驗方法도 工業規格으로 制定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열효율 특성을 말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인 줄 안다. 다만 國內外의 여러 文獻들을 調査參考하고 여기에 필자 자신의 연구 시험결과를 덧붙여 정리함으로써 長久한 역사를 지닌 ‘온돌’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데 어떤 길잡이 역할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일 뿐 깊이 있는 보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2. 온돌의 특징


난방장치로서의 온돌은 다른 난방 방식과 특이하게 다른 점들이 있으며, 그러한 특징들이 온돌의 열효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온돌이라 하면 아궁이와 굴뚝을 포함한 난방설비 전체를 말할 때도 있고, 협의의 온돌 즉, 방열체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 문헌에 흔히 나오는 판넬식 放射난방을 온돌로 치면 放熱體만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본고에서는 특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협의의 온돌을 방열체라 칭하여 혼동을 피하기로 한다.


1) 판넬식 방사난방

우리나라의 온돌은 판넬식 즉, 平板形 放熱體로부터 주로 放射에 의하여 열을 방안에 방출시키는 난방방식이다.

방사난방에 있어서는 방열체로부터 실내에 방출되는 50∼70%가 방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와는 달리 對流式 난방에 있어서는 70∼75%의 열량이 대류에 의하여 실내에 전달된다.

판넬식을 그 구조, 위치 및 熱媒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a) 구조에 따른 분류

(1) 파이프매설식

(2) 닥트(고래)식

(3) 유니트식


최근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급되고 있는 溫水온돌은 1)에 해당된다. 2)의 닥트식은 콘크리트 닥트 또는 고래 속으로 열풍, 열가스 따위를 통하게 하여 난방 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온돌은 이에 해당된다. 3)의 유니트식은 금속板을 쓴 것이 많다. 太陽熱 집열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조립하여 편리하게 쓸 수 있다.

(b) 위치에 따른 분류

(1) 벽판넬식

(2) 바닥판넬식

(3) 천장판넬식


방열체가 실내의 어느 쪽에 붙어 있는가 그 위치에 따라 난방 효과가 다르다. 소련의 페치카는 벽판넬식이며, 중국 북부 지방의 캉은 벽판넬과 바닥판넬의 중간형이 되는데, 우리나라의 온돌은 전형적인 바닥판넬식이다. 바닥판넬식이 난방효과가 가장 좋다.

(3)의 천장판넬식은 온돌의 방열체를 천장에 거꾸로 붙인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c) 使用熱媒에 따른 분류

(1) 온수 또는 증기식

(2) 열 공기 또는 연소가스식

(3) 전열식

온수는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판넬식에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은근하게 가열되어 주택 난방에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열기는 공장 난방 같은데 천장판넬에 사용된다. 주택난방에는 사용되지 않으며, 특히 바닥판넬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古來로부터 전해져 오는 온돌은 (2)에 해당한다. 현재 전부가 연소가스를 고래 속으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되어 있으나, 앞으로 열공기식으로 하여 태양열 난방에 적용시켜 볼만하다고 생각된다.

(3)의 전열식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온돌방열체에 사용된 적이 있으나, 전력요금이 고가인 최근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기담요는 널리 보급되고 있으나 이를 판넬식이라 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2) 온돌의 표면 온도와 방열량

판넬식 방사난방에 있어서 방열체의 표면온도는〈표 1과 같이 최고허용온도가 낮다. 특히 바닥판넬식은 31℃로서 가장 낮게 되어있다. 〈표 1은 ASHRAE guide에서 권장하는 표준이다.

〈표 1〉 판넬표면의 허용최고온도

가열면의 종류

허용최고온도℃

플라스타마감천정

       〃     벽

일반바닥파넬

방의4주바닥판넬

복도바닥판넬

철판판넬(증기)

   〃   (온수)

43

43

31

43

43

82

71

온돌의 表面온도에 대하여 이건씨 등은 인체가 느끼는 감각도를〈표 2와 같이 예시하고 필요한 표면온도는 30∼35℃라 하였다. 여기서 예시하는 온도는 잠깐 손을 대서 느끼는 감각이고 오랫 동안 앉거나 누워서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표 2〉  人體가 느끼는 감각도

온돌의 표면온도℃

          감  각  도

25

30

40∼50

60

80

차 가 움

미지근함

따뜻함(적당)

가장 따뜻하고 참을 수 있음

오래 손댈 수 없음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으나 필자의 경험으로서는 온돌에 앉을 때는 27℃ 이상 35℃까지가 적당하고, 누워서 잘 때는 22℃이상 25℃가 좋은 것 같다. 표면온도가 22℃보다 낮을 때는 요를 깔고 자도 차가움을 느끼게 되고, 25℃보다 높을 때는 바닥이 뜨거워서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온도 조건에서는 온돌 표면으로부터 실내에 방출되는 열량이 부족하게 된다.

보온시공이 되어 있지 않은 재래식 일반 주택의 경우, 서울 지방의 외기온도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추울 때에 난방실온을 18℃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닥 面積을 1㎡당 약 180㎉/h의 열이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 온돌의 표면온도 31℃일 때에 실내에 방출되는 열량을 계산해 보면 125㎉/㎡h밖에 안된다. 또한 표면온도를 35℃로 하였을 때에도 방출열량이 165㎉/㎡h로 되어 역시 부족하다.



3) 좌식생활과 전도전열

放熱體 표면에 직접 앉거나 누워서 잔다는 난방방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 외에는 그다지  없는 것 같다. 라디에이터, 콘벡타, 각종 난로, 온풍기, 페치카 등 모든 난방 장치가 방사 및 대류에 의한 열 전달로 난방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온돌은 방열체 표면에 직접 앉거나 누우므로 인체가 방열체 표면에 접하게 되어 전도전열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전술한 바와 같이 온돌의 표면온도를 35℃ 이상 올리는 것은 적당치 않으며, 이 때에 실온이 18℃보다 낮아진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또한 야간 취침 시에는 표면온도를 더욱 낮게 하여야 하며, 더욱이 방열체 표면을 이불로 덮어서 방열을 막는 결과가 되므로 실내 온도는 더욱 떨어지게 된다. 실내 온도가 떨어져 물이 어는 수도 있다. 특히 북한지방에서는 방안에서 물이 어는 것을 예사로운 일이다.



3. 온돌의 장․단점


3-1. 온돌의 장점

전술한 온돌의 특징으로 미루어 온돌의 장단점을 알 수 있으나 여기서는 다른 여러 가지 난방 방식과 비교하면서 다시 장점과 단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난방의 효과온도가 높다.

2) 바닥 쪽이 따스하여 頭寒足熱이 된다.

3) 실내에 장식물이 없다.

4) 과열․인화 등의 염려가 없다.

5) 실내에서 재나 먼지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1)의 난방 효과라는 것은 인체가 온돌 표면으로부터 방사열을 받을 때, 인체가 느끼는 감각 온도는 실온 이상으로 높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非加熱面 즉, 외벽 가까이에서는 효과 온도가 낮아진다.

일반적으로 방사난방에 있어서는 室溫을 다른 난방 방식보다 약간 낮게 잡는다.

3-2. 온돌의 단점

온돌의 단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열효율이 낮다.

2) 完溫의 제어가 어렵다.

3) 시공이 까다롭고 자주 보수하여야 한다.

4) 표면온도를 맞추는 데 무리가 있다.

5) 연탄가스 중독의 우려가 있다.

온돌의 열효율은 재래식 부뚜막 아궁이에 연탄을 땔 때 대개 30% 정도로 낮다.

4)의 표면온도에 관하여는 앞에서 상술한 바 있거니와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하기 때문에 春秋季節에 외기 온도가 쾌적할 때에도 온돌에 불을 때야 하는 수가 많다.

이상과 같은 장점과 단점들을 다른 유형의 난방장치와 비교해 보면〈표 3과 같다.


〈표 3〉  각종 暖房장치의 특징 비교

난방장치

形 式

效率 %

경제성

편의도

安全度

연탄온돌

溫水온돌

부뚜막식 아궁이

함실아궁이

煉炭아궁이

기름보일러

30

60

60

70

×

×

×

연탄난로

석유난로

가스난로

電氣난로

굴뚝 있음

   〃

   〃

굴뚝 없음

70

80

85

100

××

×

溫風機

(기름용)

굴뚝 있음

85

     ◎ 가장 좋다.  ○ 좋다.  △무방하다.  × 나쁘다.  ×× 가장 나쁘다.



4. 온돌의 열효율


4-1. 효율의 정의

熱效率이란 일반적으로 入熱에 대한 有效出熱의 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온돌 난방에 있어서도 투입된 연료가 가지고 있는 열량에 대하여 난방 목적에 유효하게 쓰여진 열량이 얼마나 되는가를 백분율로 나타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 견해의 차가 있다.


       

(a) 종합효율

온돌의 열효율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아궁이에서 굴뚝까지의 종합효율을 뜻하는 것으로 치는 것이 常例이다. 이 때의 入熱과 出熱은 다음과 같이된다.

入    熱 : 공급된 연료가 보존하는 열량

有效出熱 : 온돌방안에 방출된 열량


(b) 온돌부만의 열효율

협의의 온돌인 온돌부만의 열효율이 된다. 熱傳達部인 온돌부는 고래의 기하학적 형상, 고래 단면의 크기, 개자리의 유무, 열가스의 流入口와 流出口의 상대적 위치 등에 따라 열효율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돌부만의 열효율을 따지는 데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때의 入熱과 出熱은 다음과 같이된다.

入    熱 : 고래 안에 들어간 열량

有效出熱 : 방안에 放出된 열량


(c) 아궁이 효율

아궁이 즉, 熱發生部의 열효율을 말한다. 이 때의 입열과 출열은 다음과 같이된다.

入    熱 : 공급된 연료의 보유열

有效出熱 : 온돌부의 고래 안으로 들어간 열량

여기서 여러 가지로 견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즉, 부뚜막식의 경우 아궁이 위에 솥을 올려놓아 물이 끓었다면 그 열량을 유효열로 간주하여야 아궁이의 열효율이 옳게 나타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엌이 따스하게 된 것도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로 실온이 올라간 것이니까 이 역시 유효열에 가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방을 목적으로 하는 온돌인 이상 부엌에서 방출되는 모든 열량은 손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d) 연소효율

연료의 연소효율은 연료가 가지고 있는 열량을 입열로 하고 여기서 未燃分損失 不安全燃燒損失, 炭災의 현열손실 등을 뺀 열량을 유효출열로 한 것이다.

아궁이 또는 화덕 등의 성능 또는 연료 자체의 품질을 따지는 데 필요하다.


4-2. 실제의 열효율 및 각부분의 열손실

실제의 열효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부뚜막식 아궁이에 연탄을 때는 재래온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a) 연소효율

연료가 아궁이(화덕) 속에서 연소될 때의 연소효율은 약 91%가 된다. 이 때의 열손실을 세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ⅰ) 연탄의 未燃分損失---------------- 3%

ⅱ) 연탄의 불완전 연소손실------------ 5%

ⅲ) 탄재의 현열손실------------------ 1%

        계                              9%


이 연소효율은 저질 연탄일 때 저하되며 연소통이 불량하거나 파손되었을 때 또한 효율이 저하한다. 그리고 온수보일러의 경우 연소통이 보일러 水室壁에 밀착되어 있을 때도 연소가 잘 안되어 효율이 떨어진다.


(b) 아궁이의 열효율

연료가 보유하고 있는 열량중에서 고래 안에 들어가는 열량은 약 49%가 되며, 절반 정도가 손실되고 있다. 각 손실을 구분하면

ⅰ) 연소과정에서 ------------------- 9%

ⅱ) 연소통 뚜껑에서 ---------------- 18%

ⅲ) 아궁이 주변에서 ---------------- 19%

ⅳ) 유도관에서 -------------------- 5%

      계                               51%


여기서 연료의 연소열만을 입열로 할 때에는 아궁이 효율은 53.8%가 된다. 그러나 아궁이 효율이라면 연료의 보유열을 입열로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c) 전열부의 열효율

협의의 온돌 즉, 전열부의 열효율은 단열시공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바 대략 60∼80% 정도이다. 열교환기로서의 온돌 방열체는 효율이 좋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들장의 열전도율이 낮고, 고래 안의 열가스의 흐름이 저속이어서 層流를 이루고 있으며, 고래밑과 外周壁으로 열의 貫流損失이 많은 등 열교환 조건이 아주 좋지 않게 되어 있다.

각 부분의 열손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ⅰ) 고래밑으로 ---------------------- 29%(14%)

ⅱ) 고래 外周壁 ---------------------  6%( 3%)

ⅲ) 굴뚝으로 ------------------------ 4%( 2%)

    계                                   39%(19%)


위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연탄의 보유열량을 入熱로 하였을 때의 효율을 나타낸 것이다.


(d) 종합효율

아궁이-온돌(狹義)-굴뚝을 통한 열효율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온돌의 열효율은 약 30%밖에 안된다. 나머지 약 70%의 열은 난방에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되는 바, 이 손실열들을 각 부분별로 따져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ⅰ) 연탄의 연소과정에서 ----------------------  9%

ⅱ) 부엌으로의 방열 -------------------------- 30%

ⅲ) 아궁이 밑으로 ---------------------------- 7%

ⅳ) 유도관(로)에서 ---------------------------  5%

ⅴ) 고래밑과 外周壁으로 ---------------------- 17%

ⅵ) 굴뚝으로 -------------------------------- 2%

       계                                         70%


4-3. 열효율의 향상 방안

(a) 함실아궁이의 보급

표 3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일반 재래식 부뚜막 아궁이에 연탄을 땔 때의 난방효율은 30% 정도밖에 안되는 데 비하여 같은 연탄을 함실아궁이에 땔 때에는 효율이 60%로서 2배가된다. 그러므로 부뚜막식 대신 함실아궁이로 바꾸는 것이 에너지절약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함실아궁이는 또한 연탄가스 중독 방지에도 부뚜막식 아궁이보다 유리하다.


(b) 연소통(화덕)의 개량

국산무연탄은 여러 가지 불가피한 조건 때문에 해마다 탄질이 떨어져 간다. 그러므로 연탄의 발열량을 높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보아야 할 것이며 앞으로 저질연탄을 가지고 이를 완전 연소시키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연소기(화덕)를 대폭적으로 개량하여야 한다. 현재의 연소기는 탄동이 耐土物 2㎝ 두께로 되어 있어서 보온력이 약하다. 이를 단열성이 높은 재질로 현재의 두께보다 2배정도 두껍게 하면 저질연탄도 완전 연소되며, 지속시간도 충분히 길어져서 연탄갈이가 3부제, 4부제를 면할 수 있게 된다.


(c) 온돌의 단열시공

온돌 밑바닥과 外周壁으로 빠지는 열의 손실은 4-2(c)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약 35%가 된다. 온돌의 열효율이 좋지 않은 주요원인이 이러한 구조적인 결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래밑 부분과 외기에 접하는 周壁의 보온을 철저히 하여야 할 것이다.


(d) 통풍의 개선

연탄 온돌이 통풍이 잘 안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점으로 되어 있다.

통풍이 잘 안되면 연탄을 피울 때부터 꺼지기 쉽고 유독가스가 많이 나며, 불완전연소하고 未燃分이 많이 남는 등 효율 저하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결함을 없애기 위하여 연탄가스 배출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공업용 연소장치에서는 거의 전부가 강제통풍방식을 택하고 있다. 자연통풍방식보다 열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이 온돌에도 도입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전이 장시간 계속될 때의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5. 맺는말


온돌이 우리 민족과 더불어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치 좋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결점들이 뒤따르며, 그 밖에도 유독가스배출, 소위 3부제, 4부제 탄갈이 고역, 탄재 처리 등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온돌은 우리의 것이라고 무조건 전래의 구습만을 답습할 것이 아니다. 傳熱工學的으로 본 모순과 불합리성을 현대과학에 맞도록 加一層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참 고 문 헌

배순훈,〈온돌改良 設計에 關한 硏究, R-74-50 科學技術處.

차종희,〈在來式 暖房 geometry에 따른 熱特性에 關한 硏究, 科學技術處,    1970.

최서국․박금철․안재휴,〈가정열관리 標準化에 關한 調査硏究,

       工業振興廳(1977).

李澤植,〈온돌의 熱效率向上에 關한 硏究, R-72-10, 科學技術處(1972).

김정수,〈농어촌 住宅의 온돌의 科學化와 開發方案에 關한 硏究,

       科學技術處(1973).

이  건․남정수,〈농촌주택 熱管理 構造 改善에 關한 硏究,

      建築硏究所資料, No.252(1973).

ASHRAE Guide and Data Book : ASHRAE(1970)

송태윤․최서국․안재휴․강용식,〈가정熱管理標準化에 關한 조사연구,

 

온돌(溫突)의 기원과 변천



朱 南 哲





1. 온돌의 뜻과 기원


온돌이란 漢字로는 溫突 또는 溫堗이라 쓰며, 이는 고래를 만들고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고래 한 쪽에 만든 아궁이에 불을 지핌으로써, 구들장을 덥게 하여 그 열을 취하여 추위를 막는 난방장치이다.

이 온돌은 만주지방에 널리 쓰인 캉[炕]과도 흡사한데, 온돌이 데우고자 하는 실내의 전부 혹은 절반 정도만을 온돌 바닥으로 한다면, 炕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로 쌓아 일부만을 덥게 하는 것이 다르다 하겠으나 그 근본은 거의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일찍이 孫晋泰 先生1)의 언급처럼 온돌과 炕은 같은 源流로서 韓半島의 북부와 만주지방에서 사용되어 널리 전파된 것이라 생각된다.

온돌이 쓰여진 실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咸鏡北道 鍾城郡 雄基 松坪洞 先史住居址로서, 이 주거지에서는 板石을 세워 구들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板石을 덮어 바닥을 만든 것이 발굴되어 溫突의 유적으로 보지만2) 오늘날 학계에서는 심히 의문시하고 있어, 溫突의 始原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그것은 先史時代의 住居址로서 구들고래가 있었다는 사례는 오직 이것 하나이며, 이 주거지 발굴 전후에 발굴된 수많은 선사시대 주거지들을 살펴볼 때 모두 화덕자리는 있으나 구들고래는 없으며 화덕자리만 있다는 것은 바로 온돌과 같은 것의 존재를 부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硏究3)로서는 온돌의 상한선은 막연히 三國時代인 四世紀末 이후라 할 수밖에 없다.

《三國志》魏書 東夷傳 高(句)麗條에


都於丸都之下 方可三千里戶三萬 多大山 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又祀靈星社稷…….


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또《舊唐書》卷一九九 上 列傳 第149 高(句)麗條에는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庭乃用瓦 其俗貧窶者多冬月皆作長坑 下燃溫火以取暖……(밑줄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 後者에는 “佛寺”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이는 佛敎가 高句麗에 전래된 小獸林王 2年(A.D. 372) 以後의 기록이고, 前者는 그 이전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기록에서 가난한 사람들 즉, 貧窶者들은 대부분 겨울에는 장갱(長坑)을 만들고, 그 아래 불을 지펴 덥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오늘날 온돌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이의 始原 樣式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長坑’만으로 이것이 혹 중국의 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나, 고구려 유적지[土城里 遺蹟]에서 火道4)가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또《隋書》卷八 列傳 第四六 東夷에 “俗好蹲踞 潔自喜以趨走烏敬拝則曳一脚”이라 기록된 것이나 또 雙楹塚, 四神塚의 벽화에서 墓主들이 平坐한 모습, 그리고 서있는 사람들의 바지 엉덩이에 뾰족한 모습으로 되어 이것은 삼각형 천을 덧댄 것으로 평좌에 기인된다는 복식사적인 생각 등으로 長坑은 분명 溫突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長坑이라는 구절이 나타나 있는 기록에만 “佛寺”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의 발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 이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5세기경부터 온돌은 발생, 전파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2. 온돌의 전파와 발달


온돌은 분명 추운 北方系의 난방구조라 생각된다. 그리고 처음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난방구조로 발생하여 점차 지역적으로나 계급적으로 전파되어 나갔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우선 지역적으로 생각할 때, 고구려와 인접해 있는 백제나 신라에서 온돌을 만들어 사용하였는지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百濟의 주택에 관계된 자료나 문헌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우선《新唐書》東夷傳 百濟條에

“俗與高麗同”이라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별차 없는 주택에서 생활하였고, 또 온돌도 가난한 사람들 간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三國遺事》卷第2 南夫餘前百濟北扶餘條에


又泗沘崖又有一石 可坐十餘人 百濟王欲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煖因堗石(밑줄은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이를 堗石이라 했다 하며 堗石에 대하여 아무런 註가 없는 것을 보면 溫突이 백제에서도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다음 신라에서는 온돌의 존재를 긍정할 자료도, 또 부정할 자료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다.

《三國史記》卷第三三 志第二 屋舍條에서 溫突을 지칭할 만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고, 또《三國史記》卷第三 新羅本記 第一에


憲康王六年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 不以茅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밑줄 필자)


이라 기록되어 이 기록에서 경주의 민가들이 장작으로 밥을 짓지 않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는 것이 곧 온돌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또한《新唐書》東夷傳 新羅條에


…冬則作竈堂中 夏以食氷上…


이라 기록되어, 이로써 겨울이면 室內에 부뚜막을 만들었다는 것이 곧 온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도 꼭 그렇게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여름에 얼음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급이란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귀족계급이었을 것이며, 또 겨울에 실내에 부뚜막을 만든다는 것은 겨울이면 실내의 부뚜막을 사용한다는 해석이 보다 더 올바르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년 겨울이면 만들고, 여름이면 부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高句麗에서도 盛冬이면 長坑을 만든다는 것이 한 번 만든 것을 여름이면 사용하지 않다가 겨울이면 사용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더욱이 오늘날도 여름이면 부엌 마당에 한데 부엌을 만들어 거기서 밥을 짓는 것과 안압지에서 출토된 ‘풍로’들을 보면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에 溫突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현단계로서는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실정이다.

한편 한국 주택 나아가 한국 건축의 중요한 二大 바닥 구조의 하나인 ‘마루’가 신라시대부터 건축되었다는 추측의 가능성도 온돌연구에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三國遺事》卷三 塔像 第四에


…朴朴師 占北嶺獅子嵓 作板屋 八尺房而居 故云板房 夫得師 占東嶺磊石下有水處 亦成方丈而居焉 故云磊房…


이라 기록되었으니, 이 기록에서 사자암에 가서 손쉽게 만든 도 닦는 처소[方丈]가 8尺 넓이의 판옥이며, 이를 板房이라 한 것은 그만큼 당시에 널리 보급된 구조라 생각되고 더욱이《三國史記》卷三三 志第二 屋舍條에서 玳瑁나 沈香 같은 고급 목재를 쓸 수 없었다는 사실이나, 家型土器에서 바닥이 높이 붙어 있는 것 등은 모두 마루의 존재를 입증해 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5)

따라서 추운 겨울이 긴 북쪽지방으로부터 온돌이 발생되어 남쪽지방으로 전파되었고, 더운 여름이 긴 남쪽지방으로부터는 마루가 발생하여 점차 북쪽까지 전파되어 나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를 지나 高麗時代에 이르면, 온돌은 한반도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또 계급적으로도 서민계급에서 상류계급까지 널리 퍼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우선 王朝와 같은 상부 구조가 바뀐다고 하여 한 번 건축하면 상당한 기간 사용되는 주택과 같은 하부 구조 또한 곧 바뀌는 것이 아님으로써,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온돌이 고려초부터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온돌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문헌으로는 崔滋(A.D. 1188∼1260)의《補閑集을 들 수 있는 바, 同書 卷下에


華嚴月首座餘事……有黙行者 不知族氏年可五十 或爲髮或爲頭陀……時豫適在龜城 道人存純 謂豫言行者 嘗冬月敷一座具 差一衲衣 衲中無蟣螽坐氷堗上寒色不形 學道後進 抱冊往從質疑者 無不委細開說 方大寒恐 其凍也 候出時遺房子 急爇柴頭而去 行者來觀之無喜溫色 徐出戶拾石礫塡堗口泥其灰塗隙而上 宴坐如初自是不復遺溫也…….(밑줄 :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의 내용은 평안북도 龜城에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黙行者에 관계된 행적으로서, 崔滋가 氷堗이니 溫其堗이니 또는 堗口 등에 대하여 아무런 註 없이 기술한 것을 보면 분명히 온돌이 당시에 널리 쓰이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後集 卷七條에


冬月臥泳堗 寒威來刮骨 幸今燒拙揖 一束炎己發


이라 하였고, 이 기록에서도 泳堗에 대하여 아무런 註없이 사용한 것은 바로 같은 이유라 하겠다.

더욱이 조선시대 초기의 사람인 李奎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卷十 溫堗坑辯証說條에서 당시보다 100여 년 이전인 高麗 시대 末期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舊退計百年前公卿貴戚宅中煖堗不過一二間爲老病所處餘皆板架上寢處其廳中囲以屛帳籍以重茵…


이 기록은 바로 上流 주택에서는 온돌방을 노인이나 병자들을 위해 한두 칸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로 하여 거기에 병풍과 장막을 둘러치고 지낸 것을 말해 주는 바, 이는《高麗圖經에서 말해 주는 상류주택의 모습으로 이로써 고려시대에도 온돌은 전국적으로 또 상류계급까지 전파되었으나, 이를 주로 사용한 계급은 서민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시대의 온돌


1) 온돌의 계승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온돌은 전국적으로 그리고 모든 계층간에 널리 전파되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조선시대 초기부터의 주택실례가 현존하며, 더욱이 中期 이후에는 많은 수의 實例들이 현존하기 때문에 온돌에 대한 고찰은 용이해 진다.

현존하는 住宅遺構中 가장 오래된 것은 江陵市 竹軒洞에 있는 강릉 烏竹軒(寶物 165號)으로써 본래 1452년 登弟하여 兵曹參判, 大司憲을 지낸 바 있는 睡齊 崔應賢의 고택으로 후일(1573년 12월 26일) 이 軒의 온돌방(夢龍室)에서 李珥가 탄생하였다.

이 軒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인 바, 좌측 4칸은 우물마루 바닥으로 되어 있는 大廳이고, 우측 1칸 반은 온돌방이며, 이 방 후면으로 반 칸의 툇마루가 달려 있다.

또 이보다 조금 후대에 건축된 강릉 海雲亭(寶物 183號, 1530년 건축)을 보아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좌측에 한 칸의 온돌방을 우측에 4칸의 우물마루로 된 대청으로 구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바로 초기부터 온돌로 된 방과 마루로 된 대청이, 주택, 혹은 정자에 있어 그 평면을 결정해 주는 두 개의 기본 요소가 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위의 두 실례보다 더 규모가 크고 정자나 별당, 또는 사랑채만의 성격을 벗어난 상류주택으로 月城 孫東滿氏家(慶北 慶州郡 江東面 良洞, 重要民俗資料 23號)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택은 孫東滿씨의 19代祖 孫昭(1433∼1484)가 25세 때 건축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으로 一字形 행랑채와 口字形의 몸채로 그 平面이 구성되어 있다.

一字形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인데, 광이 4칸, 방 2칸, 마루 1칸, 대문 1칸으로 구성되어 행랑인의 거처로는 온돌방이 주를 이룬다.

몸채는 口자형 평면의 대각선을 중심으로 안쪽에 안채,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안채는 부엌, 안방(3칸), 대청(6칸), 머릿방(2칸)으로 구성되고, 사랑채는 한 칸되는 두 개의 방과 1칸의 대청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의 구성에서 온돌의 바닥으로 된 방과 우물마루바닥으로 된 대청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인 河回 忠孝堂(慶北 安東郡 豊川面 河回洞, 寶物 414號)을 살펴보면, 一字形 평면으로 된 행랑채와 口形의 평면으로 된 몸채, 그리고 祠堂으로 구성되었다.

몸채에서 안채를 살펴보면 부엌 옆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안방이 붙고, 그 옆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안대청, 그리고 여기에 다시 상방과 기타 방들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랑방, 같은 크기의 골방, 그리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 그리고 다시 작은 방과 작은 대청이 붙어 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말기에 건축된 주택들 또한 허다한 실례들이 현존하며 이들 주택 모두에서 온돌바닥으로 된 방들과 우물마루로 된 대청이 주택을 형성하는 기본요소이며, 또 온돌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대로 계승되어 축조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주택 평면과 온돌

한반도는 과히 넓지 않은 땅이면서도 이는 海洋性 氣候地域에 속하여 다양한 풍토성을 이루며, 이로써 조선시대 주택건축에 영향을 주어 각 지방마다 상이한 평면구성을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나타난 다양한 庶民住宅의 평면들을 유형별로 고찰할 때 바닥이 온돌로 된 房, 바닥이 마루로 된 大廳, 바닥이 흙바닥으로 된 부엌, 이상 세 가지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바, 이는 그만큼 온돌바닥의 중요성을 말해 주며, 또 이로써 분류된 것을 보면, 함경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부엌과 방들로만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며 중부 이남에서는 이에 대청이 첨가된 것을 볼 수 있다.6) 즉, 이는 온돌이 한국 주택의 구성에 기본이 됨을 말해 준다.

특히 한반도 전역에 나타난 가장 적은 단위의 주택을 보면 어느 지역이고 간에 부엌 한 칸에 온돌방 한 칸으로 구성되며, 또 조금 커져 방 한 칸이 두 칸이 될 때에도 온돌방으로만 구성되고,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중류 이상이라야 마루로 된 대청이 설치되는 것을 보면 온돌방의 중요성은 자못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온돌방은 구들고래, 아궁이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방 전체를 구들고래와 구들장으로 구성하는 方法으로 한반도 전역 대부분에 분포된다.

둘째, 방 전체 크기의 2/3 정도만 구들고래를 제대로 놓는 방법으로 제주도 지방의 주택들이 이 모습을 이루고 있다.

다음 불때는 아궁이의 형태에 따르면

첫째, 아궁이 그 자체만으로 구들장을 데우는 경우로, 이는 전국적으로 독립된 방에 채택된다. 예컨대 아궁이와 부뚜막을 겸하는 두 번째의 경우를 제외한 것이다.

둘째, 아궁이가 곧 조리를 담당하는 부뚜막이 되는 것으로 보통 안방이 이에 속하며, 따라서 안방 옆 아궁이가 놓여지는 공간은 부엌이 된다.

그러나 함경도 지방에서는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체가 없어 아궁이를 겸한 부뚜막이 방과 같은 높이에 오고, 그 아래에 커다란 아궁이가 딸리고, 따라서 부엌 바닥은 안방의 높이와 상당한 차이를 이루게 된다.

셋째, 제주도 지방의 부엌에서는 아궁이와 부뚜막이 별도로 독립되는 바 솥을 거는 곳이 방에 불때는 아궁이의 다른 쪽으로 붙어 있다.

다음 구들을 놓는 방법을 고찰하면, 제일 보편적인 것이 구들골을 나란하게 하는 나란히고래이고, 이외에 부챗살 모양으로 하는 선자고래, 그리고 구들고래를 형성하지 않고, 구들장 네귀에 돌을 놓아 구들장을 괸 허튼고래, 이상 세 가지의 어느 하나로 만들어지게 된다.


3) 坐式生活과 온돌

한국 민족이 住生活에 있어, 언제부터 坐式生活로 접어들었는지 지금 단계로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는 아마도 선사시대의 竪穴住居內에서의 생활이 자연히 좌식생활이었다고 생각되며, 이 생활은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건축다운 건축이 이루어지고, 계급사회로서 계층간에 어떤 차이점이 형성되면서 주생활상에서도 차이가 생겨, 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예컨대 高句麗의 壁畵古墳에서, 墓主 부부가 平坐하고 있는 모습이 있는 반면, 또 어떤 벽화에서는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도 있는 것으로 보아, 立式生活도 병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의 문물을 기록한《高麗圖經에서 귀족층은 ‘臥榻’같은 것을 사용하는 즉, 입식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그러나 韓國傳統住宅의 정수라 할 조선시대 주택에서는 온돌과 마루가 主 바닥구조가 되고 여기에서의 생활이 좌식인 것은 바로 삼국시대 서민층으로부터 형성해 온 온돌이 한국 생활의 좌식생활 형성에 큰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온돌에서 이루어진 좌식생활은 家具의 樣式도 좌식생활에 맞게 영향을 준 가장 기본적인 요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온돌은 좌식생활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좌식생활은 가구의 양식을 결정하였고, 이것은 곧 주택의 내부 공간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안방의 내부 공간구성8)에 있어 안주인이 앉아 있는 아랫목 주위에는 문갑, 반닫이 등의 坐高의 눈높이 아래에 오는 家具들을 놓고, 윗목에 키가 큰 四方卓子나 또는 윗방에 삼층장이나, 농들을 놓는 것은 바로 좌식생활이 내부 공간구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이며, 이는 곧 온돌에서 기인된 것이다.

특히, 아궁이와 가까운 아랫목 온돌바닥이 내부 공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인 되는 이의 자리인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4) 안방물림과 온돌

조선시대 住生活에 있어 가족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儒敎의 영향으로 家父長的인 大家族制度가 이루어진 것이고 이에 따라 주택은 대가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인의 居處空間인 사랑채와 안주인의 거처공간인 안채가 全住宅空間에서 가장 중요한 位階에 있고, 이중 안채에서는 안방이 곧 ‘안주인’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방을 차지하는 사람이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안방을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소위 ‘안방물림’은 바로 자신이 안주인에서의 은퇴와 며느리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인계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때 안방이 왜 건넌방이나, 머릿방, 또는 상방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도 안방에 불때는 아궁이 그 자체가 부뚜막이 되고, 이는 곧 부엌을 이루며, 나아가 안에서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식생활의 주인이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金光彦의 지적9)처럼 井邑 金東洙家에서는 안방물림은 없으며, 이 때 안방과 작은방(또는 윗방)을 비교하면, 방의 크기나 모습이 같고, 또 두 방 다 한 쪽에 부엌[정재]이 붙어 있는 것은 비록 하나의 事例라 하나 주의를 요하는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안방물림이 있는 여타 지역, 예컨대 경상도 지방의 주택에서는 안방은 부엌과 붙어 있고, 또 크며, 머릿방 또는 상방은 부엌과 떨어져 있고 독립된 아궁이로 불때게 된 것을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 진다고 할 수 있다.



4. 결 어


한국의 온돌은 고구려의 서민계급에서 5세기경 발생하여 점차적으로 백제나 신라로 전파된 듯하며, 한편 신라에서 발생된 마루와 함께 한국전통주택의 二大 바닥구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주택, 특히 조선시대의 주택평면을 고찰할 때 온돌과 마루는 부엌과 함께 세 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들에 따라 평면의 유형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온돌은 한일합방 이후의 한식주택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또 일본식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주택에서까지도 계승되어 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난방법이 온수난방으로 대체되면서 소위 판넬히팅으로 바뀌었으나, 이도 실제 온도의 원리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너지자원 특히 석유자원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온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이의 개량으로서 유구한 역사의 소산물인 온돌을 계승 발전시켜 에너지 보존이라는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 방면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본고에서는 온돌의 기원과 그 계승, 중요성만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다.



□ 참 고 문 헌


金光彦,《井邑김씨집, 悅話堂, 1980.

金正基,〈文獻으로 본 韓國住宅史,《東洋學》7集, 1977.

-----,〈溫突についての二,三の考察,《日本建築學會論文報告集제 60號,    1958.

金載元,《韓國史》-古代編-, 진단학회.

孫晋泰,《民俗學論攷, 民學社.

朱南哲,《韓國住宅建築, 一志社, 1980.


 

출처 : 인테리어목수클럽
글쓴이 : 빌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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