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건축사

[스크랩] 건축이론 :: 이집트건축

김프로님 2007. 8. 16. 18:22
건축이론 :: 이집트건축
 
-이집트건축-
구석기시대 이후 로마시대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 미술은 BC 3100년경 제1왕조가 성립된 시대부터 점차 원시적 단계를 벗어나 제4∼5왕조시대에는 이미 고전적 양식을 보여줄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제12왕조, 제18∼19왕조, 제26왕조 등의 시대에는 특히 그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인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동물 등을 신으로 숭배하였고, 또 내세(來世)를 믿어 사자(死者)를 후장(厚葬)하였다. 예술은 이와 같은 종교관에 입각하여 영원성을 조형화(造形化)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견고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져서 불변불후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종교교의(敎義)가 일단 정해지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양식도 수천 년에 걸쳐 지극히 미미한 변화밖에는 없었다.



■이집트 건축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북동부를 흐르는 나일하구부터 그 상류에 있는 제 2폭포간의 긴 지역을 말한다. 북에는 지중해, 동에는 아라비아사막, 서에는 리비아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국토의 길이는 약 700마일이 되나 그 폭은 2-10마일에 불과하며, 남쪽은 자연에 의한 차단이 없으므로 시대에 따라 국경이 변경되기도 하였었다. 온화한 기후와 나일강은 세계최고의 이집트 문화를 이룩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B.C 4000년경에 이르러서 농경법을 발전시켰으며, 건축과 공예등을 발달시켰다. 특히 나일강에서 나는 갈대와 진흙을 가지고 주거를 만들었으며, 진흙으로 흙벽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후세의 이집트건축의 주요한 재료가 되었다.

건축과 조형예술의 구체적인 발전이 시작된 것은 나일강 유역의 민족들이 통일 국가를 형성하여 이집트 왕국이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그들이 형성한 국가는 파라오라는 왕국이 통치하는 극단한 군국주의체제였으며, 왕은 라의 후손이라는 신앙으로 신과 같이 존중되었고, 정치상의 주권자이며 종교상의 주체였다.

제 3왕조에는 건축가 임호테프에 의하여 제세르또는 조스와의 거대한 사카랄의 피라미드가 건설되었고, 제4왕조에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 조각등에서 볼 수 있는 갈대와진흙으로된 원시주거의 형상에서 발전된 것으로, 그 형태 요서가 후의 석조건축등 장식면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있다.

특히 이집트인은 흙벽돌을 쌓는데 많은연구를하였으며, 균열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벽을 일체로 쌓지않고 일정한 길이로 구분하여 쌓음으로써 균열이 일정한 장소에 생기게 하여, 구조상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하는동시에 수리하게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성체의 중량이 매우 크므로 그것을 잘 지탱하게 하기위해서 성체를 경사지게 만들어 밑은 넓고 위느 좁게 하였다. 이롸 같은 성체의 경사는 고대 이집트 건축에서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또 이집트인은 벽돌을 많이 사용하여 보올트 구조를 발전시켰다. 이집트인은 단순하고 원시적이긴 하였으나 조석을 하느데는 능통하였으며, 기계없이 거석을 다루는 기묘한 법을 알고 있었다. 이집트 왕국의 석조건축은 풍부한 자원과 준비된 조직적 건축활동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전쟁 포로와 농부들이 주로 동원되었으며, 공사 중 장기간의 노동을 위하여, 공사장 부근에 큰 시설을 건설하는 수가 많았다.

석조 건축등의 구조형식은 주로 기둥과 보로 조립되었으며, 성체는 방형의 돌을 모르타르 없이 쌓아 올렸고, 그 벽은 안쪽으로 경사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 지방의 흙벽돌 기둥의 벽체형태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며, 이 벽면의 경사느 벽체에 안정감을 주어 아름답게 하느 건축적인 표현을 만들었으며, 또 꼭대기에는 요철형의 몰딩을 사용하였다.


1)고왕국의 건축

제 1왕조 이후에는 왕과 귀족의 묘들을 흙벽돌로 쌓아서 지하에 건축한 마스터바가 건축되었으며, 외실은 죽은 사람 내실은 죽은 사람의 장식을 보관하는 곳으로 세르다므라고도 칭한다. 마스터바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구조 및 안전에 대한 갈망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있으며, 인간의 존재와 삶을 영원히 이어가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제 3왕조의 제세르왕은 사카라에다 마스터바를 자기 생존중에 건축한 단형피라미드를 건축하였다. 이 단형피라미드는 역사상 최오의 건축가로 기록되어 있는 임호테프가 설계한 대규모으 분묘 복합의 일부분이다.

피라미드의 형체가 완성된 것은 제4왕조에 이르러서였으며, 3대의 피라미드는 쿠푸, 카프레 멘푸레3왕의 성체이며, 그중 가장 큰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그리고 제 5왕조에 이르러서는 더 많이 피라미드를 건축하게 되었고, 피라미드에 추가하여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신전이 건축되었다. 이와 동시에 태양신 라에 대한 신앙이 왕성하여졌고, 태양신의 상징으로 오벨리스크가 건립되엇으며, 후에는 장식화 되었다.
2)중왕국의 건축

중왕국은 고왕국의 건축문화를 계승하였고, 이 시대에는 분묘가 널리 서행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터널형이었으나 나중에는 내벽에 벽화를 그리게 되었으며, 입구의 방향은 관례에 의하여 동면으로 하였다. 그리고 분묘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상 이집트 베니하산의 분묘이다.

3)신왕국의 건축

제 18-20왕조 즉 1570에서 1100년간에 있어서 이집트 문화는 그절정에 달하였다. 건축에 있어서도 황금시대를 형성하여 일반으로 이집트 건축을 대표한다.

하트세프수트여왕의 분묘신전은 BC 15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3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지며, 가장 낮은 테라스는 정원으로 나무가 심어졌다. 그리고 이장례용 복합건물군은 입구, 의식행렬도로, 중정, 묘실, 신전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훨씬 더 인간적인 척도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신전의 양쪽에는 양이나 스핑크스가 있으며 신전의 간인 파일론 에 이르기까지 줄을 지어 놓여져있다. 그리고 파일론은 신전건축의 외관에서 미적효과와 제사의 의식적 효과를 주는 것이다.

그외에는 카르나크의 아몬은 수대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BC1300년경에는 이집트 최대의 신전건축이 되었다.

4)결론

고대 이집느의 건축은 주로 신전건축이 이를 대표한다고 볼수 있으며, 이것은 그들의 종교관념과 왕의 권한을 상징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 평면은 초기에는 좌우대칭이었으나 증축또는 수축되어 다소 변경이 있었으며, 구조로는 사용 재료에 의하여 벽이 두꺼워지고 개구부는 사각형의 형식이었으며, 거석으로 구성되며, 지붕은 평지붕으로 역시 거석으로 되어 있다

이집트 건축은 크기에 대한 관념이 주가 되어 있고, 그 장식들은 거의 상징적인 그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들이다. 그 종류는 매우 많으며, 모두 화려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대신전들은 3차원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유한한 시간과 무한한 영원성을 재조적으로 표현하는 4차원적인 조형물들이며, 그들이 갖고 있었던 종교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인터넷 자료

건축의 유구(遺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묘와 신전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축상 주목되는 최초의 분묘형식은 왕조 성립기 전후에 나타난 마스타바(아랍어로 걸상)라는 왕과 귀족의 묘로서, 처음에는 지하에 현실(玄室)과 그 부속실을 만들고 지상의 상부구조에 몇 개의 방을 두어 부장품을 넣었으며, 그 위를 양건(陽乾) 벽돌로 쌓아올려 직사각형의 대(臺)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마스타바는 고왕국시대에 들어와서 귀족의 묘로 발달하여 현실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어간 수혈(竪穴)에 접하여 만들고 상부구조의 측면은 경사가 져서 사다리꼴을 이루었으며 그 안에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과 예배소, 조상실(彫像室)을 배치하였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사카라에 6단의 마스타바를 쌓아올린 형태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구축하였다. 제4왕조부터 왕의 분묘는 정사각형 추형(錐形) 피라미드가 된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북쪽부터 쿠푸·카프레·멘카우레 등 왕들의 것인데,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5 m, 평균 2.5 t의 돌이 230만 개나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현실은 석축(石築)의 거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는 정사각추의 석축과 예배소, 나일강변의 신전, 예배소와 신전을 연결하는 지붕 덮인 낭하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및 3세의 분묘는 테베의 델 엘 부하리에 있으며, 마스타바에 피라미드를 얹은 형태이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에 피라미드를 세웠으며, 그것은 규모가 작고 재료도 양건벽돌이었다. 중왕국시대에 중(中)이집트 등 사막이 나일강 가까이까지 뻗은 지방에서는 귀족의 분묘를 절벽 중턱에 설치하였다. 신왕국시대 왕들의 분묘는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횡혈식으로 만들어졌고, 도굴에 대비하여 입구는 비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장제전(葬祭殿)은 멀리 떨어진 사막의 대지 끝이나 평지 위에 세워졌다. 델 엘 부하리에 있는 하트7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경사진 길로 연결된 3개의 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데, 중정(中庭) 둘레에 콜로네이드(列柱)를 세운 형식으로, 배경을 이루는 단애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람세스 2세의 장제전인 라메세움, 메디네트 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장제전 등은 사자와 함께 신들이 모셔져 있었으므로, 그 설계는 신전과 거의 비슷하였다. 신전에는 고왕국시대의 것으로 제5왕조의 태양신 ‘라(Re/Ra)’의 신전형식이 밝혀져 있으며, 상하가 압축된 모양의 오벨리스크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중왕국시대의 신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신왕국시대 및 말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전형식은 카르나크(테베)의 콘수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스핑크스가 늘어선 참배도(參拜道)가 끝나는 곳에 오벨리스크를 전면에 세운 양쪽에 탑문(塔門)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뜰이 있고 좌우에 별주랑(別柱廊)이 있다. 뜰 안쪽에 현관이 있으며, 그 곳을 지나면 다주실(多柱室)이 된다. 다주실 안쪽은 신관(神官)이나 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특별한 날에 콘수 신상을 얹어 나르는 성주(聖舟)를 격납(格納)하는 방과 그 밖의 방이 있고, 가장 안쪽 벽에 붙은 콘수 신상을 안치하는 방을 중심으로 3개의 방이 있다.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룩소르의 신전 등은 규모도 크고 형식도 복잡하지만, 부분적인 요소는 콘수 신전의 형식과 다름없으며, 다만 이것을 확대하거나 반복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형식은 덴데라·에드푸·필라에 등 말기의 신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사막이 나일 강변까지 근접한 지방에는 신전의 대부분 또는 일부를 단애 속으로 파들어가서 만든 암굴신전·반암굴신전도 있다. 아스완 댐의 건조에 따라 절단(切斷)하여 이전한 아부심벨의 신전은 전자의 예이다. 분묘나 신전이 석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세워진 데 반하여 세속건축은 주로 양건 벽돌이나 목재 등을 사용하였다. 제18왕조의 이단왕(異端王) 이크나톤이 천도하였던 수도 텔 엘 아마르나에서는 정궁(正宮)과 이궁(離宮), 고관의 저택, 새 수도 건설에 종사한 기술자의 집합주택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건축의 특징이 되는 기둥의 형식을 보면,
① 네모난 기둥에는 여신 하트호르의 두부(頭部)를 주두부(柱頭部)에 부조(浮彫)한 것(하트호르 기둥)과 수의(壽衣)를 입은 왕의 상(像)을 그 앞에 세운 것(오시리스 기둥) 등이 있으며,
② 원주(圓柱)에는 8면 또는 16면 등으로 이루어진 프로트 도리스주(柱)와 각종 식물(야자·연꽃·파피루스)을 모티프로 한 것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출처 : 서울전문학교
글쓴이 : 전문학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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