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옥

[스크랩] 전통 한옥관련 - 창호정보

김프로님 2007. 8. 9. 00:30
          세살문의 종류

 

 

 

세살창문(細箭窓戶)은 그림과 같은 모양으로 살을 세로, 가로 또는 수평에 대하

30˚, 45˚, 60˚로 빗대어 짠 창문을 총칭하는 말이나 띠살문을 지칭 할 때

도 있다.

        띠살                      격자살                    교살               30˚솟을살    60˚솟을살

 

      격자빗살               격자교살              육모솟을살            세모솟을살            삼각솟을살

 

          한옥의 대문 상세도

 

       

문은 나가자고 만든다 

 

대문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무슨 소린가 싶어 눈치만 본다. 서구식 개념에 몰입된 사고방식으로는 한옥의 마음이나 생각을 읽기 어렵다.

어느 젊은 학자가 말을 하였다. 골목으로 들어가 꺽이면서 짧은 고샅을 지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데 이런 구조는 당초부터 의도된 지혜의 소산이라 하였다. 얼른 들으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 멋진 언어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그래 물어 보았다. 막다른 골목안의 입향시조(入鄕始祖)의 집이 처음부터 그런 골목을 의도하여 진입하도록 계획하였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느냐 하였더니 경천지동할 만큼 놀란다. 입향시조가 이 고장에 왔을 때는 아직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그런 상태였다.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룩하였다고 해서 입향시조로 존숭(尊崇)된다면 그가 처음 집을 지었을 때는 유아독존의 지경인데 무슨 골목이 생길 수 있었겠느냐고 하였더니 고개를 외로 꼬면서 눈만 끔뻑인다.
장난삼아 그에게 물었다.
“경주 불국사엔 가 봤을 터이니 청운교, 백운교가 있음은 익히 알고 있을 터인즉, 위에 있는 층층다리가 백운교냐 아니면 청운교냐?”
갑작스러워서인지 어리둥절해 한다.
절을 짓는 선지식들은 인간 위주로 절을 짓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국사는 대웅전 일곽에서부터 석가여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청정한 즐거움을 속세로 널리 퍼져 나가게 해서 만인 대중을 제도하겠다는 서원(誓願)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여래의 법이 자하문을 열고 청운교, 백운교를 딛고 속세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여 사바세게를 이룬다는 설정을 하였다. 이는 종교의 관점이다. 인간이 층층다리로 올라간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집에서의 대문도 들어가자고 만든 것이 아니다. 나가자고 만든 것이다. 문빗장이 안쪽에 설치되어 있는 까닭이 된다. 들어가는 기능이 위주였다면 여닫는 시설이 밖에 있어야 한다.
집은 사는 주인을 위주로 짓는 시설이다. 살기 위해 짓는 것이 집이다. 들여다보자고 짓는 경우는 없다. 입향시조의 집 대문도 마찬가지이다. 나가자고 만든 것에 속한다면 골목이 길고 짧고의 해석도 달라야 한다. 순서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도 그런 해석을 시도하기 전에 입향시조의 집 앞에는 아직 골목이 형성되었을 단계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직 혼자 살고 있는 처지인데 골목을 이룰 집이 앞에 있을 리 없다는 점을 밝히면 사고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배산임수한 산기슭의 집은 들어가면서는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집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어렵다. 대문과 대문간채가 눈에 뜨일 뿐이다. 반대로 안채 마루에 올라서면 앞이 환히 내다보이는 법이다. 이 시야는 집안과 집을 다스리는데 아주 요긴하다. 사랑채 사랑방에서는 대문 밖 동정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지만 대문에서 사랑채의 기미를 알아채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 예는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채인 연경당 사랑방 윗목 머름대에 기대 앉아 슬며시 내다보면 중문을 거쳐 대문이 빤히 보인다. 문밖에서 야료 부리는 녀석이 있다면 당장 물고를 내라고 호통 칠 수 있는 기미를 포착할 수 있다.

경상남도 함양의 정여창선생 댁 사랑방에서도 지켜보면 대문 밖의 동정을 주인이 알아차릴 수 있게 구조하였다. 사랑채와 대문간의 간격이 꽤 멀고 더구나 서로의 위치가 일직선상에 나란히 포치된 것이 아니라 사랑채는 대문에서 보면 거의 45도 각 정도의 위치에 있다. 사시(斜視)에 가까운 구성이다. 그래서 문 밖에서는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는 주인장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구도는 삶을 여위함에서 겪는 많은 경험이 토대가 된 기휘(忌諱, 꺼리고 싫어함)의 방편인데 자기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강구될 수도 있다.

열고 나가는 문의 성정은 들어오는 사람을 제어하는 장치에 관심을 두게 한다. 대문이나 중문에 ‘내외벽'을 만드는 일도 그런 장치의 하나가 된다.


                       솟을대문/솟을삼문/평삼문

 

솟을대문(聳大門)은 대문간 지붕이 양쪽 행랑채 지붕보다 높기 때문이며 평대문보다 격조가 높

다고 여겼다.

 양반집에서는 사랑채로 출입하던 중문에는 작은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우기도 했는 데 이는 남성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공간인 안채의 공간을 달리하였던 조선시대의 남존여비사상을 보여 주

는 예라 할 수 있다.

대문은 보통 판문으로 만들며 안으로 열리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두 문짝위에 살대를 꽂은 다음 중앙에 관아나 향교, 서원의 홍살문처럼 창(槍)을 세워 장식

하기도 하였다.

 

솟을삼문(聳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중앙 어칸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좌우 각

칸에 평대문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중앙의 지붕은 좌우 평대문의 지붕보다 높게 솟았다.

이 삼문은 사대부집 외에도 관아, 향교, 서원 등에 더 많이 설치되었다. 

예외로 대문을 솟을삼문이 아닌 평삼문(平三門)형식으로 하여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집 중앙

어칸에 대문간을 두는 경우도 있다. 

 

평대문(平大門)은 솟을대문과 대비되는 문이다.

대문의 지붕과 대문옆에 설치된 행랑채의 지붕 높이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사대부집의 경우 안채로 출입하는 문인 안대문과 안중문은 모두 평대문으로 하였다.

 

1. 소슬대문 사진

                  

                                                  연경당 장락문

 

     

 

 

                

                                                         추원재(대전)

 

                                                        선교장(강릉)

 

             

                                                측면 (소쇄원) 

 

 

                            홍살문 처럼 장식한 소슬대문(거창 황산 신씨 마을)

 

 

2. 소슬삼문사진

 

                                                      고양 향교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춘천)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통도사 내(양산)

 

                                                       청계서원(함양)

 

        

                                              단성향교(경남 산청)

                                          가운데 3칸이 평삼문이다

                                             야는 문이 와이래 많노....

 

3. 평대문

                                               윤증 고택의 안중문(사진:한국의 문과 창호)         

       

                                                  아산 외인리 참판댁

잠금장치에도 화려한 멋이 풍긴다 - 자물쇠

지금 당신의 주머니에 몇 개의 열쇠가 있는가? 열쇠가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타인으로 부터 보호되어야 할 소유물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열쇠를 채워놓은 것은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살고있는 집은 물론 사무실, 자동차, 금고, 캣비넷 등으로 부터 작게는 개인용 컴퓨터와 보석함, 그리고 일기장에 이르기까지 주변은 온통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열쇠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디지털이 생활에 적용되면서 카드열쇠, 홍채, 지문으로 다양한 열쇠의 사회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떠 하였을까?

물론 일반서민들에게 열쇠는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열쇠를 채워 놓을 물건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에 열쇠를 말하는 것은 대개 있는 집의 얘기가 된다.
있는 집의 열쇠는 일반적으로 집 밖의 열쇠는 남편이 관리하였지만, 집안의 모든 열쇠는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래서 시집 온 며느리에게 열쇠꾸러미를 넘겨주는 것은 집안의 모든 살림을 넘겨주는 것과 같은 상징성이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보호하여 주는 자물쇠이기에 그 모양새도 그냥 대충 만듬이란 없다. 보호개념이 강하여 신성한 문양으로 만든 주술적 자물쇠가 있는가 하면, 집안에 놓고 항시 보아야 될 것이기에 장식성을 가미하여 화려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이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어차피 기능성이 앞에 있기에 열쇠에 보다는 열쇠를 매다는 고리, 즉 꾸러미에 더 신경을 썼다. 대개는 커다란 철사에 주렁주렁 매다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동전모양의 커다란 원판에 매달기도 하였는데 그 원판에는 글씨나 동물문양을 새겨넣기도 하였고 때로는 아예 동전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물쇠와 열쇠는 동양에서는 독립된 개체로 매달아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서양에서는 동양과는 조금 달리 발전하였다. 동양에서는 문짝(門扉)에 고리를 매달아 이 고리를 서로 연결하는 방편으로 자물쇠를 사용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자물쇠를 아예 문에 장착하여 놓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문에 열쇠구멍이 있어 바로 열게 되었고, 이러한 것은 커다란 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을 정복한 자는 정복당한 이에게 항복의 표시로 성의 열쇠를 건네 받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런 의식에서 ‘행운의 열쇠’가 탄생하였으니 서양에서는 자물쇠의 의미보다는 열쇠의 의미가 더욱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열쇠가 들어가는 열쇠구멍도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 구멍을 통해서 집안으로 마귀가 들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이나 아주 중요한 회의를 하는 날에는 열쇠구멍을 막아 신성함을 유지하였다.

그러면 우리선조들은 언제부터 자물쇠를 사용하였을까?

문헌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마도 인간의 소유물이 생겨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부터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발견된 유물로 본다면 안압지에서 발굴된 철제자물쇠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빗장유물이 통일신라것으로 보이기에 그때부터 일반화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워낙 부식이 심하여 형태를 볼 수 가 없다.
현존하는 전통 자물쇠는 대개 조선시대 후기의 것들인데, 그 모양이나 용도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사각모양으로부터 사작하여 물고기모양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다양할 뿐 아니라 그 몸통에 새겨진 문양도 복을 불러오는 글씨부터 십장생의 동물문양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형태는 모두 조선후기의 것들로 유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영향을 받은것 들인데 그 이전 즉 불교국가로 볼 수 있는 신라나 고려시대의 것들은 남아 있는 것들이 없다. 이렇게 조선 이전의 것들이 남아 있지 않는 이유는 자물쇠가 채워진 물건, 즉 뒤주나 보석함과 같이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용도폐기되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물쇠도 같이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조들은 자물쇠를 가구의 일부로 본것이라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자물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다만 옛 석조물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있는데, 석탑이나 옛 고승들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부도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석탑의 경우 대개는 사각의 형태인데, 몸통 1단 정면에 전통적인 여닫이 문의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는 영락없이 열쇠가 채워져 있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석탑은 불교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이므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공간이기에 이를 보호하는 경호원격인 신장을 새겨놓음은 물론이고, 출입문에는 단단하게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초기에 생겨나는 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부도 자체가 화려하기에 여기에 표현되는 열쇠 또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나타난다. 시대적인 양식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보통의 사각형의 자물쇠에 장식성이 가미되어 양쪽 끝에 불길모양의 화염문이나 구름문양의 운문이 조각되어 잠금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1989년 경북 예천의 작은 절인 한천사(寒天寺)에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사찰을 새롭게 바꾸는 조경공사가 한창이었다.
물길에 쓸려내려간 마당을 복구하고 나무를 심는 와중에 무엇인가 흙더미에서 쓸려 나온 덩어리가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땅속에서 묻혀 있어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청동으로된 조각이었다. 더 깊게 발굴하여 본 결과 쇠북의 일종인 청동반자와 종의 상부에 놓이는 청동용뉴, 그리고 금동자물쇠가 세 개나 출토 된 것이다.
그 중 금동자물쇠의 모양은 통일신라와 고려초기에 조성된 탑과 부도의 자물쇠와 모양이 똑같아 문양으로만 보아온 실물을 볼수있게 되었다.
이 자물쇠를 보존처리하여 본 결과 자물쇠 몸통에는 뽀족한 송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문양을 새기는 은입사법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었다. 그 문양은 당초문양, 모란당초문양, 고사리문양, 물고기알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고, 윗부분의 걸림쇠끝에는 연꽃이 피어나듯 꽃봉우리를 장식하였다.
또한 발견된 가장 큰 자물쇠는 한쪽끝이 빠지면서 두개로 분리 되는데, 다른 작은 것들도 형태는 같지만 부식으로 분리는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로서 석조물에 새겨진 자물쇠의 문양이 단순한 조형적 문양이 아니라 실물을 그대로 조각하였다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어떤 형태로 자물쇠를 상용하였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자물쇠 세점은 김천 직지사성보박물관에 보존처리되어 일반에게 전시되고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장 화려한 문양의 자물쇠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 TIP
서울에서 전통 자물쇠를 보려면 대학로의 쇳대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조선후기의 많은 자물쇠들을 전시하여 놓았는데 한곳에서 다양한 자물쇠의 형태와 문양을 볼수있기때문이다.(www.lockmuseum.org)
고려시대의 자물쇠를 보려면 김천의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 3점이 일반 공개전시되고 있다. (www.jikjimuseum.org)

                                                          

궁중의 창살(창덕궁 낙선재)

창(窓)이라 함은 밀폐된 공간에 구멍을 낸 것을 말한다.
이렇게 벽에 구멍을 내는 이유는 모두가 용도가 있는데, 그 용도에 따라서 그 모양과 방법을 달리 한다. 우선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있고, 방안에서 외부를 바라보거나 환기를 조절을 위한 창문, 또한 낮 동안의 조명역할을 해주기 위한 광창이 있는데 봉창이 이에 속한다.
또한 냄새나 환기를 위한 주방의 환기창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용도에 맞게 만들어진 창에는 그 용도에 맞는 문짝이 걸리게 마련인데, 이 문짝에 우리조상들의 멋이 들어가 있다.
바로 문짝에 한지를 바르기 위한 창살의 모양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문은 한지를 안에서 바르도록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내부에서 창을 바라보면 한지너머로 창살의 무늬가 생기는데 그 문양이 햇살의 위치에 따라서 창살의 무늬와 그 그림자로 말미암아 시시각각 달리 보인다.
이곳에 조상들이 멋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궁핍한 서민들이야 실용적인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사대부에서는 자신의 유교적 정신을 표현한 소박한 창살이 사용되었다. 또한 왕이 거쳐하던 궁궐에서 사용된 창살은 크기나 두께로 보아도 그 자체로서 위엄을 지니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녀자가 거쳐하는 별당이나 궁궐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화려함을 나타냈는데 현재 남아있는 가장 화려한 창살은 역시 창덕궁 낙선재의 창살이다.



낙선재라는 건물 자체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후궁을 위해 지어진 집이니 집의 전체가 하나의 목조예술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화려하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창살의 문양을 보노라면 아지 자기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 된다.
그중에 특히 살이 아주 가늘면서도 곳곳에 한껏 멋을 부렸는데 창살마다 각각의 조각이 새겨져있고 그 모양 또한 다양하다.
일반적인 아자(亞字)문양의 창살과 전자(田字)의 창살을 기본으로 하여 곳곳에 변화를 주었는데 원형이나 다이아몬드형태의 창살을 첨부하기도 하고, 창틀에 십장생 동물들의 문양을 조각하여 달기도 하였다.

그리고 방과 방으로 연결된 문에는 여려 종류의 창이 동시에 달려 겹창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겹창으로 만드는 이유는 방음과 난방이 주 목적이겠지만, 그곳에 각 방에서 바라보았을 경우 창살이 직접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도 역시 내부문의 창살에는 한껏 멋을 부린 형태이다.
주로 거처하는 안방의 북쪽으로도 특이하게 창을 만들었는데, 후원의 경관을 바라보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북쪽으로 창을 냈으니 겨울에 찬바람이 아니 불리가 없다. 그래서 북쪽으로 난 창에는 겹창으로 겨울바람을 막았다. 우선 내부에는 겹 미닫이를 달았고 밖에는 다시 여닫이문을 달아 이중삼중으로 난방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미닫이문에서는 밖으로 문의 형태가 보이지 않게 벽안으로 집어넣는 두껍닫이를 만들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남녀의 내외가 확실하던 시절이니 내부에서는 보이지만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종이가 아닌 비단으로 발랐는데 이는 방충망의 역할까지 한 셈이다. 또한 겨울에는 대청마루가 추우니 여름에는 문을 열어서 뒤쪽에 걸어두었다가 겨울이면 벽으로 활용하는 분합문이 대청마루 위쪽으로 단정하게 매달려 있는데 낙선재에서 가장 소박한 창이 이 분합문의 창살이다.

낙선재 창살의 화려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낙선재를 중심을 남서쪽으로 사랑채가 ㄱ 자로 있는데 전면에는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서쪽으론 상궁처럼 바로 아래 계급의 여자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곳의 창살 역시 화려한 무늬는 없지만 창살의 문양자체로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사랑채의 창살은 낙선재를 중심으로 안쪽으로는 화려하게 장식하였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광창은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게 꾸민 것이 특징이다. 유난히 낙선재에는 창이 많아 그만큼 창문도 많이 달려 다양한 창살이 있다.
그런데 창이 많으면 난방에 상당히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한겨울의 난방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만약에 지금처럼 모든 창에 유리가 달렸다면 아마도 난방에 커다란 애로를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선조들은 창살에는 한지를 붙여 난방을 해결하였다.

아름다운 창살에는 한지가 최고

또 아름답게 창살을 꾸며 창을 달았는데 이곳에 한지가 없다면 어떨까? 한지가 없는 창살은 어딘지 모르게 폐가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창살에 한지는 대개 가을에 바꾸어 바른다.

햇살이 좋은 날을 잡아 옛 한지를 떼어내고 새로운 한지를 바르는데 흠뻑 물풀을 묻힌 한지는 창살에 바르면 처음에는 울퉁불퉁하지만 마르면서 서서히 팽팽해진다. 이렇게 마른 창의 한지는 살짝만 건드려도 탱탱한 소리가 나는데 이렇게 발라진 한지는 방의 공기와 외부의 공기를 순환시키면서 열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즉 한지는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한지는 유리에서 생기는 성에도 없고, 오히려 손을 대면 따뜻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한지에 창살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방안의 예술이 연출되는 것이다.

 

 

 

 

 

 

                    실용과 멋이 어우러진 민가의 창살(선병국 가옥)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한옥은 모두가 조선시대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그 이전에 지어진 한옥은 모두 전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현존하는 가정집 한옥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유교사회가 지배하던 시대이니 만큼 절제를 생활의 덕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민가의 창살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대부분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맛을 풍긴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가옥에서는 절제된 멋 속에서도 멋을 맘껏 부렸는데,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창살을 가진 한옥이 바로 충북 보은의 선병국가옥이다.

창덕궁 낙선재의 창살이 조각으로 멋을 부렸다면 선병국가옥의 창살은 조형적으로 멋을 부렸다. 주로 남자들이 생활하던 사랑채는 빗살과 팔각의 원형으로 단순하게 만든 창으로 통일하여 연속무늬의 형태를 가지면서 가는 창살로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반면 여자들이 생활하던 안채는 역시 사랑채와는 다른 아기자기한 멋을 부렸다.

이러한 멋은 빛과 환기를 위한 광창에서 절정을 보여주는데, 광창에 팔각의 독립 창을 만들고 그 안에 또 다시 수를 놓은 천을 붙여 멋을 부렸다.
그런데 그 자수가 최근에 제작된 현대의 것이니, 아직도 이 가문의 멋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겨울철에는 이렇게 밖 창을 닿고, 안창을 조금 열어 밖을 내다보게 만들었다가 여름이면 밖 창을 열어 위로 올리고, 안창만을 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대부집안에서는 실용이 곁들어진 정취 안에서 나름의 멋을 부렸다.



그에 반해서 일반 민가에서는 이러한 멋은 사치요 생활의 낭비로 여겼을 것이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창살에 멋을 부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가에서는 그냥 田자형태의 단순무늬로 다듬도 없이 만들어 달았다.
겹창을 달수도 없었기 때문에 겨울이면 문틀마다 문풍지를 달아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았고, 여름이면 바람이 통하는 사창을 달지를 못하고 그냥 한지를 떼어 내고, 그 맨 창살에 천을 달았다. 그리고 가을이면 천위에 종이를 달았고, 다시 여름이 오면 한지만 떼어 내면 매년 사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최근까지도 이어져왔는데 모기장의 천을 창살에 달았고 그 위에 한지를 달았다. 이러한 방법은 한 창살로 겹창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고, 또한 천이 튼튼해서 한지가 구멍이 난다든지 하는 창의 훼손을 방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어느 정도 먹고사는 집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집들이 살이 망가지면 망가지는 대로, 대충 고쳐서 생활을 하였는데 그 만큼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충청도 아산의 어느 한옥 사랑채의 창살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함도 아니요 단순함도 아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갔으니 사랑채는 그냥 광으로 사용하는 한옥이었는데, 물건들이 수시로 드나들다보니 창살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수리한 모양이 너무나 재미있고 무심하여 보였다. 부러져 없어진 창살의 부분은 대충 나무로 잘라 붙였고, 부러진 창살은 광목천으로 말아 이었다. 바로 우리가 살아온 민가의 살림살이를 단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옆 초가집에서도 생활의 단편을 볼 수가 있었다. 집이 작으면 창도 작을 수밖에 없다. 초가집의 환기와 조명 역할을 하는 광창은 그야말로 귀엽기까지 한 아주 작은 모양이다. 그런데 환기를 위해 창을 열어 놓았는데 그 모양이 또한 너무나 재미있다.
두 쪽을 모두 열어놓아야 얼마 되지도 않건만 활짝 두 짝을 모두 여는 것보다는 작지만 한쪽만을 열어 또 다른 여분을 남겼다.

작은 것에서도 생활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우리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찰의 창살은 실용이 아닌 장엄

인류문화의 가장 상류에는 항시 종교문화가 있다.
권력보다도 오히려 종교가 문화적으론 상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축과 조각의 최고는 대개 종교건축물에서 발견 할 수 있다. 건축의 창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민가에서나 궁궐에서의 창살은 모두 실용성을 위주로 제작이 되는데 반해서 종교공간인 사찰에서는 화려함과 엄숙함을 나타내기위한 사찰장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찰의 창살은 실용성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종교공간의 장식에 해당이 된다. 그래서 사찰의 창살은 유난히 화려한 조각이 많고, 정교한 기하학적인 무늬나 꽃 창살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찰의 창살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크게 나누어 꽃문양을 조각해놓은 꽃 창살, 빗살문양으로 모양을 낸 격자창살, 꽃과 잎을 함께 조각하는 꽃나무창살, 그리고 온갖 종류의 동식물을 조각해 놓은 조각창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창살 중에 가장 많은 창살은 역시 격자창살이다. 그런데 같은 격자창살이지만 민가나 궁궐에서보다 오히려 크기 면에서 앞선다. 화려함보다는 디자인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장엄함이 표현이 되는데 이러한 창살에는 철 못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끼워 맞추는 방식이 사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는 강진의 무위사와 영주의 부석사, 그리고 예산의 수덕사의 창살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모두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된 법당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렇게 오래된 목조건축에서 격자창살에 단청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는 대개 창살이 격자창살로 단순하면서 장엄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꽃 창살이 만들어지면서 창살에도 단청을 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대부분의 꽃 창살은 조선시대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목조건축에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꽃을 조각하고 꽃무늬에 맞게 채색을 단청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목조건축은 지붕은 팔작지붕에 전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창살도 전면에 많은 창이 제작된다. 정면중앙에는 네 개의 창이 만들어지고 좌우의 칸에는 두개의 창이 있어 전면에서 보면 총 12개의 문짝이 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12개의 문에 중앙에는 가장 화려한 꽃문양이 조각되고 각각 측면의 문에도 각기 다른 문양이 만들어져 화려함과 다양함이 곁들어진다. 현재 이러한 창살이 가장 화려하게 남아있는데 해남 대흥사 천불전 창살과 논산 쌍계사 대웅전 창살, 대구 동화사 대웅전 창살, 선운사 등에서 볼 수 있다.
꽃 창살은 대개 꽃송이 하나하나를 각각 조각하여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강화의 정수사 법당의 창살은 또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

통나무로 조각되어있는 강화 정수사 창살

이곳은 통나무를 통째로 조각하면서 화분부터 줄기, 잎과 꽃까지를 조각하였다.
그래서 하나의 문짝이 하나의 나무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에도 역시 실색에 맞게 단청으로 채색을 하여 더욱 하려하게 장식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살이다.

그런가하면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창살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창살이다. 창살의 조각이 마치 연못의 한 장면을 연출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맨 아래쪽에는 물속의 형태로 이곳에는 잉어와 메기 등 물고기들이 조각되어있고, 그 위에는 새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찾는 모습이 있다. 그 위로는 연잎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는데 그 연잎위엔 개구리가 있고, 연꽃의 줄기에는 어린 동자가 타고 놀고 있는 모습까지 조각하여 문 한 짝에서 다양한 볼거리가 숨은 그림 찾듯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단청이 없어 원래 없던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동쪽으로도 창이 나있는 불갑사 대웅전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한국 사찰의 목조건축은 대개 남쪽을 향하면서 전면에 문을 달아놓았다.
측면은 벽으로 만들어지고 작은 출입문만이 있어 이곳을 통해 드나들게 되어있다. 전면은 오직 모신 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출입을 하게 되어있어 성직자만이 이곳을 통해 출입을 하고 일반신도들은 측면의 작은 문을 통해서 출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작은 쪽문은 인간이 사용하는 문이기에 이곳에는 장엄이 곁들어져있지 않고 실용성이 앞세워 장식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가끔 사찰에서 동쪽에까지 창살이 있는 곳이 있다.
영광에 있는 불갑사에 가면 법당의 남쪽은 물론이고 동쪽까지 창살이 있다. 정말로 특이한 구조인데 이러한 구조의 목조건축은 민가에서 정자를 지을 때 사용하는 건축적인 방법이다.
법당에서 이렇게 동쪽으로도 창살을 내는 것은 안에 모셔진 불상에 따라 이루어진다. 바로 아미타불이 모셔진 법당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은 내세를 관장하는 불상으로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에 법당의 서쪽에 제단이 만들어지고 동쪽을 바라보게 조성된다. 그런데 동쪽에 벽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전면에 창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적인 기후조건도 생각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건물은 남향으로 짓고 전면에 창을 설치하였지만 내부는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동쪽까지 창을 설치한 것으로 현재 까지 이러한 형태는 이곳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법당보다도 창살이 많은데 이곳의 창살 역시 꽃 창살로 아름답게 조성되었다. 이곳은 꽃 창살이지만 단청이 없어 고졸한 맛과 조각의 섬세함, 나뭇결이 나타내는 디테일이 디자인적으로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갖춘 창살이다.

이렇게 사찰의 창살은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에 더 치중되어 가장 화려하게 꾸미기위해 조각이 많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화려함을 강조하다보니 꽃문양이 많아졌고, 꽃의 원래의 색을 나타내기위해 단청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민가나 궁궐에서는 전면과 측면이 동일한 창살이 조성된 것에 비해 사찰의 창살은 불상이 바라보는 전면에 가장 화려한 장식이 들어있고,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화려함보다는 장식성을 강조한 각기 다른 창살이 만들어진 것도 특징이다.

문과 창호의 종류와 쓰임새


여닫는 방법에 따라 여닫이, 미닫이, 미서기, 들어열개 등으로 나뉜다.


1) 여닫이

 문틀의 선대인 문선(門線)과 문짝의 울거미 선대에 돌쩌귀(乭迪耳)를 달아,

 여닫게 만든 것이다. 안여닫이, 밖여닫이와 바깥여닫이, 외여닫이, 두짝 여닫이

 와 쌍여닫이, 또는 쌍닫이 등이 있다.

  안여닫이는 바깥에서 집 안이나 방안으로 밀어 열게 되어 있으며, 궁궐 및 주택의

 대문이나 중문들은 모두 두짝 문짝을 달았다. 또 방으로만 드나들게 한 외짝 문짝

 인 지게문도 보통 안여닫이로 하는데, 안쪽에서 빗장을 걸면 밖에서 열 수 없게

 되어 있다.

  밖여닫이, 바깥여닫이는 안에서 밖으로 밀어 여는 여닫이다. 주택이나 궁궐, 사찰의

 요사체에서 벽체 위쪽으로 높직하게 설치한 창호들과 각 방의 바깥 창호는 대개

 밖여닫이로 하여 안에서 밖으로 밀어 열게 되어 있다.

  외여닫이는 문짝의 한 짝만을 여닫는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이 지게문이다.

 두짝 여닫이, 쌍여닫이, 쌍닫이는 두 짝의 문짝 모두 여닫게 되어 있다.

 안여닫이나 밖여닫이 모두 두짝 여닫이로 할 수 있다.

 

                                               (수졸당 사랑방의 여닫이문)

2) 미닫이

 문틀을 짤 때 한 줄 또는 두 줄의 홈을 판 홈대를 아래위에 가로로 보내고,

 홈대에 문짝을 끼워 두껍닫이(미닫이를 열 때 창짝이 들어가 가리게 된 빈 곳)나

 벽체 속으로 밀어 넣는 방식의 문이나 창호를 일컫는다.

 외미닫이, 쌍미닫이, 맞미닫이 등이 있다.

 외미닫이는 문짝 한 짝을 벽체 속이나 두껍닫이 속으로 밀어 넣는 문이나 창이다.

 쌍미닫이와 맞미닫이는 두 짝의 문짝을 각각 옆의 벽이나 두껍닫이 속으로

 밀어 넣는 방법이다. 미닫이창호는 일반적으로 주택과 궁궐의 침전을 비롯한

 내전과 기타 건물 그리고 사찰의 요사채 같은 방에 설치한다.

                                                      (연경당 미닫이문)

 

      

                                              (미닫이문의 문틀과 홈대)


3) 미서기

  문틀의 아래위 홈대에 문짝을 끼워서, 문 한 짝을 밀어 다른 한 짝 옆에 붙여

 여닫는 방법이다. 두짝 미서기, 세짝 미서기, 네짝 미서기 등이 있다.

 두짝 미서기는 두 짝의 문짝으로 구성된 미서기이며, 세짝 미서기는 문틀에

 세 줄의 홈대를 만들어 세 짝의 문짝을 끼운다음, 두 짝의 문짝을 나머지 문짝

 옆으로 밀어 여닫는 방법이다. 네짝 미서기는 문틀의 두 줄 홈대에 네 짝의

 문짝을 끼워서, 가운데 두 짝의 문짝을 각각 옆으로 밀어 바깥쪽 문짝 옆으로

 붙여 여닫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넓은 방의 중앙에 미서기를 설치할 때에는

 윗방이 되는 쪽에, 곧 양 벽면 쪽에 문짝을 끼워넣고, 중앙의 두 짝 문짝은

 아랫방 쪽에 면하게 한다.

 

                                       (경주 최씨댁의 네짝 미서기 다락문)


4) 들어열개

  문짝의 윗울거미와 문틀의 윗문틀에 돌쩌귀를 달아 문짝을 달고, 이 문짝의

 돌쩌귀 반대편을 들어서 서까래나 기타 건축 부재에 매단 들쇠에 얹어 열어

 놓는 방법이다. 이렇게 열고 닫는 장지를 들장지 또는 들창이라고도 한다.

  이 들어열개창호들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나 궁궐 및 사찰의 전각 등 건축

 전반에 널리쓰였다.

  살림집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청과 방 사이에 들어열개창호를 설치하였다.

                               

 

  창호철물의 종류

 

문짝 자체를 제작할 때와 제작된 문짝을 문틀에 달아 열고 닫기 위해서는 문짝과 문틀에 여러가지 철물들을 부착해야한다. 이 철물들을 '창호 철물(窓戶鐵物'이라 부른다.

 

위/담양 고재선 씨댁 들쇠, 가운데 왼쪽/운조루 문고리,  가운데 오른쪽/예천 권씨종택 문고리

아래 왼쪽/청원 이봉령 씨댁 문고리,  아래 오른쪽/윤증고택 문고리

     왼쪽/봉화 김중환 씨댁 널문 문고리,                                오른쪽/담양 고광신 씨댁 돌쩌귀

 

 

원산은 여닫이문의 여는방향과 반대방향에 시설하여 문이 뒤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설치하는 철물로 위사진에서 양문이 만나는 부분의 하단에 삼각형으로 생긴 물건입니다.

궁궐에가시면 큰성문이 있는데 그문 밑에도 큼직하게 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돌은

원산석이라고 일컬읍니다. 참고로 위문은 안여닫이문입니다(bohyeonbong님의 사진)

             

 

 

 

 

 

 

 

출처 : 문화재수리표준시방서

 

문살의 종류

 

1. 날살문

    
매우 간단하고 깔끔한 멋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무늬이다.
    주로 禪을 닦는 수행승의 선방에 어울리며 바라지(窓)로
    도 많이 쓰이는 무늬이다.
    
    
봉정사 극락전(1363년 이전, 국보 15호), 부석사 조사당
(1377년, 국보    19호),     은해사 거조암 영산정(1375년, 국보 14호),
    
송광사 하사당
(15세기, 보물 263호)들의 옆칸 바람벽에 난 창에서 볼 수 있다.
    단촐한 짜임의 주심포 맞배집 창으로 나타나 초기에 쓰인 무늬임을 알 수 있다

                                                     

 

 

 

    부석사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송광사 하사당  

 

  

2. 띠살문
    
    
날살문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모양새로 일반집 쪽에 많이 쓰였다.
     초기에 나타나며 단출하고 깔끔한 주심포 맞배집의 문살로 쓰였으며
     
봉정사 대웅전(13-14C) 보물 55호) 3칸 모두, 송광사 하사당
(15C, 보물
     263호)의 문살들이 띠살문이다.

     단출한 주심포 맞배집의 문살로 날살이 창에 세로로 놓이면 띠살은
     가운데의 문살로 들어선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체에는 일체의 사치를 배격하는 검소함을 보여준다.

 





 
봉정사 대웅전 

 
통도사 승방

 
송광사 국사전 하사당

 3. 우물살문

     날살과 씨살을 서로 똑같은 칸으로 짜나가 우물무늬를 만들어가는 무늬살문
      이다. 살칸이 많아지고 촘촘해졌으며 문짝도 더 튼튼해졌으며 일반집에서
      흔하게 많이 쓰는 문살이다.  아름다움은 별로 없지만 규칙적인 이음이 단아
      하게 보인다.

      
부석사 무량수전(13C, 국보 18호), 범어사 팔상전이 대표적이며 범어사
      팔상전에서는 네잎 꽃송이를 새겨놓아 꽃문살이 더욱 아름답다



부석사 무량수전


우물살문


범어사 팔상전

                                                                              

  4. 빗살문

     빗살은 두 살을 서로 어긋나게 짜나가 마름모 무늬를 만들어나가는 문살이 
      다. 우물살을 모로 뉘어 약간의 멋을 부린 문살이라 할 수 있다.
      두 살이 만나는 교점에는 꽃무늬를 올려 돋보이게 하고 금강저(金剛杵:불법,
      부처, 보살을 보살피고 '慘'을 지키는 무기)를 꽃송이 대신 새겨 날카롭고
      힘찬 모양으로 꽃의 잎을 대신하기도 한다.

      
남장사 극락보전(1635-1776), 신흥사 극락보전, 내소사 대웅보전
, 쌍계사
      대웅전(17-8C),
불갑사 대웅전
에서 볼 수 있다.


남장사 극락보전


 

내소사 대웅보전


 불갑사 대웅전

 


 빗살문

   5. 소슬살문

     
씨날살과 모든 빗살에 다양한 무늬를 짜넣어 아주 복잡하면서도
      규칙적이고 화려한 문살무늬를 말한다.
      소슬이란 솟은 즉 돋아낸, 돋우어낸, 도드라진의 뜻으로 이 문에는
      거의 모두 꽃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있어 소슬이라 붙인 것같다.
      소슬꽃문, 소슬민꽃무늬, 소슬모란꽃문, 국화문, 연꽃문, 잎사귀문,
      금강저문등이 있다. 꽃문이 새겨진 바탕살은 네모나 마름모 혹은
      육모, 팔모로 짜임새가 되어있다.
      
      범어사 독성전 어칸,
신흥사 민꽃살문, 운문사 대웅전
, 용문사 대장전
      마곡사 대광보전 옆칸,
대승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



운문사 대웅전

 

 



대승사 대웅전

    

 

 

 





 

 

  6. 꽃나무살문

     
씨날과 빗살로 짠 만나는 점에 꽃무늬뿐만 아니라 꽃나무를 통째로 새겨
      문을 짠 것을 말한다.

     
정수사 대웅보전과 선암사 원통전 어칸 그리고 용문사 8모윤장대
등에서
     볼 수 있다. 연꽃이나 모란꽃들을 앞사귀, 줄기와 가지채로 길 게 새겨 올린
     것으로 보다 실물적이고 자연스럽다 하겠다.
     더욱이 정수사 꽃문은 백자꽃병에 꽃꽂이 형태의 꾸밈으로 눈길을 끈다.




정수사 대웅보전


정수사 대웅보전 꽃병문





용문사 8모윤장대

   7. 기타살문

  
    문에
만(卍)자꼴을 넣어 문살을 짠 것으로 남장사 금륜전
과 산청 율곡사
      대웅전을 들 수 있다. 중국 발음의 완자문으로 불리우며 문짝 가운데
8모틀

      짜고 그 바깥 모서리에다 卍자꼴의 꾸밈새를 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으나 궁궐을 비롯하여 양반집과 일반집의
      마루와 방사이에도 있으며 네모, 육모, 팔모  또는 둥근모양새를
      만들어 넣기도 한다. 이런 무늬는 단아한 선비의 멋을 한껏 느끼게 만든다.

      그 밖에도
아(亞)자살, 용(用)자살, 귀(貴)자살 그리고 귀갑(거북)무늬살
,
      
숫대살
의 꾸밈새도 있다. 숫대살은 담에 세워진 사립문에서 온 것으로 곧
      나무나 대가지로 엮은 기초적인 짜임새이다.

     
     
우리 문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전국 각지의 여러 사찰건물에서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 박물관장은 "이조 목수들
      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때로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능가할 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적잖이 보여 주었다.....한국의 창살무의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차원은 사뭇 눈맛의 후련함을 맛보게 해준다....은근하게
      둥글고 알세라 모를세라 모를 죽이면서 후련한 분할을 즐기고 있다"며 우리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결국 궁궐이나 사찰의 문과 창등은 그 시대의 문화의 화려함과 세련미 그리고
      정신세계까지 가늠하게 하는 것 같다.


남장대 금륜전 

 




卍자문


8모틀문


亞자문


用자문


귀갑문



숫대살문

문창살 무늬
 모든 종교의 성전이 그러하듯 우리 나라 절은 법당 안에 부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법당 내외부에 부처님의 법을 알 수 있는 벽화나 조각품이

 많다. 또 법당 문을 단순히 기능상의 수단으로서만 만들지 않고 부처님

의 법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장식했다

 

출처 : 인테리어목수클럽
글쓴이 : 빌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