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덕수궁(德壽宮)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오늘날에는 기단과 계단이 묻혀 버렸으나 전에는 다른 궁의 정문과 같이 기단과 석계가 있었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금천교
모든 궁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가 있고, 거기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덕수궁인 경우 지세 자체가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인공적으로 명당수의 금천교를 만들었다. 현재는 어구가 연못처럼 변형되어 있다. 이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중화문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 전전각(全殿閣)이 소실될 때 이 문도 소실되었고, 중화전이 중건될 당시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중화전(보물 제 819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광명문
원래 함녕전의 정문으로 함녕전 남쪽에 있었는데, 흥천사 종과 자격루 등을 전시 할 목적으로 일제 때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어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문형식으로, 중앙 도리 간에 판비가 있었으나 이건되면서 없어졌다. 가구는 원주 위에 주심포를 올리고 창방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얹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맞보형식의 대량을 중심고주에서 받게 하여 중도리를 얹고 있다. 문의 가구 기법은 견실하며 전문(殿門)으로서는 규모도 크고 내용도 충실하다.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중화전 북쪽, 즉조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종황제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고, 한때 고종의 초상화와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 사절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동쪽에 자리 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즉조당
중화전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1904년 화재를 입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한 것이다. 궁의 침전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간결하고 짜임새가 돋보인다. 전면 동쪽으로 편향하여 3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하였고, 내부는 거실로 이용하였다. 건물에 비해 높은 기단을 두었고, 서쪽의 준명당과 연결되도록 2칸 복도를 두고 있다.
덕홍전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殿閣)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정관헌
궁궐 안의 양관(洋館)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190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고종황제의 연유처(宴遊處)로 사용되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방형의 평면으로 내부 공간은 외진(外陣)과 내진(內陣)으로 구분 되었는데, 내진고주는 굵은 원주로 되어 있고, 외진주는 목제 기둥을 사용하여 주두를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하였고, 주간(柱間)상부는 투각(透刻)으로 장식하였다. 외연주 하부는 철제 난간을 돌렸는데 무늬는 투각으로 서록(瑞鹿), 송(松), 박쥐, 당초(唐草) 등을 넣어 한국적인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석어당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 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