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옥

[스크랩] [세계건축기행]조선 성리학의 개혁정신 숭례문(서울 남대문)

김프로님 2007. 3. 5. 16:18
조선 성리학의 개혁정신 숭례문(서울 남대문)
건축가 김성은 의 세계건축기행-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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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그 집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진다.”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우리가 공기와 물을 떠나 살수 없듯이 건축을 떠나 살수는 없다. 소중하지만 너무 흔해서 자주 잊고 지내지만…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에서 숨쉬고, 사랑하며, 일하고 또한 죽는다.  그동안 무관심 했던 건축의 이모저모를 이 지면을 통해 함께 하고자 한다.

   
▲ 남대문종단면도
■ 한양으로의 천도는 수월하였나?
위화도 회군(1388년)후 최영 등의 수구파를 거세한 이성계는 여러 이유에서 천도를 결심한다. 그 당시 후보지가 한양(서울)과 계룡산(공주)이었다. 계룡산 지역에서 1년 동안 기초 공사를 진행하다가 교통 불편과 농경지 부족이라는 거듭된 주장에 의해 한양으로 변경하고 공사를 강행하였으나 반대 여론에 끌려 개성 환도 후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절대 왕권시절의 천도도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인데, 민주적이고 정보가 개방된 현재의 수도이전은 더더욱 힘들어 보인다.

■ 풍수적으로 디자인된 건물이라던데…
불교나 유교가 정치적인 철학이었다면 풍수사상은 면면히 이어온 민간신앙이자 과학이었다. 새 도읍지도 풍수적으로 설계되었는데 관악산 화기(火氣)를 제압하고자 구리용을 묻거나 해태상을 세웠으며, 왜구의 침입이 잦자 아예 궁궐을 동향으로 앉히자는 주장도 있었다.

숭례문에 반영된 풍수사상을 보면 주산(主山)인 관악산을 마주보게 배치하였고, 한양풍수의 가장 큰 숙제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숭례문이라는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독특하게 세워서 배치하였다.

   
■ 어떤 철학의 건물인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신흥사대부는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왕도국가를 꿈꾸었다. 그들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이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주자학)으로 사물을 이(理)와 기(氣)로 본 학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는 지속적인 자기 개혁과 유교질서를 엄정히 추구한 결과 봉건제보다 진보된 사회를 이루게 된다, 물론, 그들 또한 기득권층이 되어 조선중기 이후에는 모순된 집단으로 격하되지만 전기에는 선비정신의 기개가 충만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성대(盛大)를 이룬다.

조선 중기 후기의 건물들이 장식적이고 세장하여 중국스럽고 퇴폐적으로 흐르는데 비해 조선 전기의 숭례문은 맑은 정신이 가득한 조선 선비의 개혁정신과 초심이 배여 있는, 단순한 아름다움의 건물이다.

■ 국보 1호가 숭례문인 이유?
국보 순번이 곧 가치의 순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문화를 대표하는 해인사 대장경, 수원성, 불국사, 석굴암 등을 제치고 숭례문(서울 남대문)이 국보 1호로 지정된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태조 7 년(1398년)에 지어져 거의 600년이 된 숭례문은 서울에 존재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며, 2단의 날개처럼 펼쳐진 우진간 지붕의 비례는 현대의 고층건물들 사이에서도 그 우아함이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는다.

일제에 의해 좌우 날개벽이 철거되고 없어 오똑한 모습은 아쉽지만 돌로 쌓은 무지개같은 홍예문과 그 위의 전벽돌 난간, 그리고 전면 5칸 측면 2칸의 목구조물의 준수한 아름다움은 어느 건물보다 큰 가치를 갖는다.

■ 우리나라 성(城)은 외국과 왜 다른가?
봉건영주 성곽이 발달한 서양의 경우 성(城)자체가 하나의 건축물로, 뾰쪽탑과 아름다운 망루 그리고 동화적인 외관으로 상당히 낭만적이다. 그러나 서양과 달리 봉건영주의 전쟁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의 성(城)은 단순한 돌담의 연속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우리의 성은 외세로부터 우리를 지켜낸 민족적 성지이다.

   


출처 : 서울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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